[그 시절 우리는] 시민아파트⑧ 그들은 그렇게 특별시민이 되었다

  • 입력 2021.03.21 18:00
  • 수정 2021.03.24 21:4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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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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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술맛 억수로 좋다. 월남에 있을 때 말야, 그러이깨네 다낭 밑에 호이안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베트콩하고 전투가 벌어졌거든. 그런데 그 전날 밤에 시내 나갔다가 콩까이들하고 어울려서 술을 억수로 퍼마신기라.

-쯧쯧쯧, 백마부대 군기가 그렇게 형편 없었등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술을 떡이 되게 마시게?

-더 들어 보그라. 다음 날 밀림 속으로 들어가서 따다다다…쏘고 볶고 한참 전투를 하다가 발밑을 보이께네, 팔뚝만한 구렁이 한 마리가 쓰윽 지나가기라. 가만 둘러보이, 고놈이 둥지에다가 알을 가득 낳아놨더라고. 옳다구나 하고 고놈 몇 개를 깨서 후루룩 묵었듬마는 속이 싸악 풀리드란 말이제. 그기 진짜 해장인기라.

-쯧쯧쯧, 허풍 떨기는.

-허풍 아이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건너편 101호 김 중사 그 사람하고 이틀이 멀다하고 품앗이로 오고가며 막걸리 잔을 나눴지요. 다리 한 쪽이 없는 상이군인이었지만 참 밝은 사람이었어요. 물론 반은 거짓말이었겠지만, 월남전 얘기를 얼마나 재미지게 잘 했다고요. 시방은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낙산지구 시민아파트 28동 105호에 거주했던 유재근 노인은 월남전 얘기를 입에 달고 살던, 그 상이군 출신의 경상도 남자가 사무치게 그립다고 회상한다.

창신동의 낙산시민아파트 공터 한쪽에는 ‘5형제 우물’이라 불리던 우물이 있었다. 수돗물이 끊어질 때면 너도나도 물통을 들고 몰려가서 그 우물 신세를 졌다. ‘5형제가 빠져죽었다’는…밑도 끝도 없는 전설을 품은 우물이었는데,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아파트 주민들이 올라가서 고사를 지내고 시루떡과 막걸리를 함께 나눴다고 한다.

요즘이야 아파트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된 주거형태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당시의 시민아파트 사람들은 빈한한 가운데서도, 인정 넘치는 촌락공동체의 생활 전통을 고스란히 이었다.

시민아파트 입주자들이 20년 상환 조건으로 빌린 분양 융자금의 월 불입금은 미미한 액수였지만, 그마저 납부하지 못해서 허둥대는 입주자들이 많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한테는 그것도 부담이 되었지요. 밀리면 가산금이 붙고, 구청 직원들이 수시로 나와서 독촉을 하니까…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집은, 작은 방 하나를 월세로 내놓기도 했어요.”

전체가 열 평도 채 안 되는 공간인데 거기서 작은 방 하나를 쪼개서 세를 놓는 사람의 처지도 딱했지만, 그 좁은 방에 서너 식구가 세를 들어서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딱하기로 치면 그들이 더했다.

낙산시민아파트는 지은 지 20년만인 1989년에 철거되었다. 철거 소문이 돌았을 때 주민들은 재개발 형식으로 그 자리에 새 아파트를 짓게 해달라고 청원을 냈으나, 서울시의 계획은 녹지공원을 조성한다는 쪽이었다. 그 대신에 상계동이나 중계동, 그리고 상암동 지역에 들어서는 32평형(25.7평) 주공아파트 입주권 한 장씩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내가 2001년도에 유재근 노인을 만났을 때, 그는 정든 동네를 떠나기가 아쉬워서 예전 시민아파트가 있던 인근에다, 소일거리 삼아 부동산중개소를 차려놓고 지내고 있다고 했다.

개발연대의 들머리에 대책 없이 ‘특별시’로 몰려가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에게 그 10여평 시민아파트는, 작으나마 소박한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준 제 가끔의 보금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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