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봄날과 도둑가시

  • 입력 2021.03.21 18:00
  • 기자명 최외순(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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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햇살, 바람 모두가 적당하여 따뜻하고 산뜻하게 스친다. 겨우내 움츠린 신경과 둔해진 몸과 정신에 생기를 불어넣는 딱 그런 봄날이다. 큰 산으로 둘러싼 이곳의 이때쯤은 아직 찬기운이 머물러야 하지만 일찍이 온 듯한 봄날이 당장은 싫지 않다. 자연스럽게 장독대를 살피고 집주변 양지바른 논두렁에도 손길이 닿는다.

전날 남편이 쑥 한 소쿠리 뜯어온 것으로 아침에 쑥국을 끓여 먹고 쑥 뜯을 생각으로 양푼이와 칼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선다. 흙놀이할 생각에 장난감을 한가득 안은 4살 막내는 신이 났다.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들은 모래밭을 삽과 괭이 등의 연장으로 놀이터를 만들어 놀고 있었고 막내에게는 모래놀이가 하루에 거쳐야 할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내가 상상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으로 아이들은 흙과 놀이를 한다.

나름의 충만함 기분을 느끼며 텃밭 주변을 둘러보니 작년 여름 수해로 밀려들어온 모래를 치우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세등등하게 삽을 떡하니 꽂아서는 멍하니 무너진 논두렁, 두터운 모래층, 음식부산물들이 쌓인 퇴비더미를 보니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될지.

집 앞 할머니 밭두렁 공사는 3일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여름 폭우는 집주변 논두렁 밭두렁을 군데군데 파헤쳐 놨다. 쏟아져 내린 물이 저마다 새로운 물길을 만들어낸 결과이다. 우리집도 앞뒤로 두 군데가 무너져 내렸는데 봄이 되니 앞쪽 논두렁 경계 부분이 전반적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뒤쪽 논두렁은 무너진 곳에 아예 밭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작년 많은 비에 밭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도랑은 아예 수로를 내기로 했다. 한 개의 밭을 두 개로 나누더라도 변한 기후에 대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막는 것보다는 자연의 법칙에 수긍하는 것으로 대책을 세운다.

이렇게 포근한 봄날, 한 해 농사의 준비는 복구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생산된 농산물의 가격보다 더 많은 복구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평지가 아닌 산골짜기의 논과 밭은 더 번거롭고 힘들다. 그래도 또 쌓아 올리고 기어이 밭과 논의 모양을 회복시키는 게 농민이 아니던가. 논두렁 사이사이에 쌓여진 돌더미는 그런 노동과 역사의 흔적일 것이다.

또 한 해 밭농사 시작을 퇴비 모듬을 흙으로 덮는 것부터 시작했다. 수해 피해를 받지 않은 텃밭 몇 평을 정리하며 뒤늦게 찰옥수수 몇 개를 거두고, 고춧대도 모으고 넝쿨과 풀더미들을 모아낸다. 밭 정리를 지켜보던 막내는 뽑아낸 고춧대를 들어주며 보았던 대로 쌓아놓는 것을 놀이처럼 한다.

풀밭을 정리하니 장갑이며 옷에 도둑가시가 가득 붙었다. “가시…”를 반복하며 도둑가시가 박힌 엄마가 안쓰러운 듯 가시를 떼어주던 막내가 “가시가 많아 안돼. 많아 안돼”라며 한숨을 쉰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혀짧은 소리를 내는 막내와 한참을 대화하며 가시를 떼어냈다. “도와줘서 고마워”하니,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긴다.

논두렁에서 쑥을 뜯고, 꽃다지, 민들레, 작은 냉이 꽃대가 밝은 채색으로 봄날이 왔다는 것을 알린다. 계절이 땅을 깨우고 그 안에 머물렀던 많은 생명들이 모습을 나타내며 봄을 알린다. 아이들도 흙을 만지고 맨발로 땅 위에 서서 교감하며 그곳에 비롯된 자신을 느끼며 땅을 의지한다.

이와 달리 어른들의 주류는 개발의 명분으로 땅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고 벽을 세우듯 절벽을 만들어 그곳에 수많은 이들의 욕구를 담아낸다. 이들의 생태계는 괴물처럼 욕망의 덩어리로 채우고 재생산되고 있다. 언제부터 이 땅과 흙이 사람의 것만이었을까. 어쩌다 땅은 욕망의 먹잇감으로 전락했을까. LH 땅투기가 알려지면서 시작된 분노, 이미 알고 있으나 모른척 했던 분노를 모아서 이제라도 변화라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봄날 도둑가시를 떼어내듯 하나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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