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된 마음으로, 원점에서 초심으로 여성농민회 이끌겠다”

인터뷰 l 양옥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신임회장

  • 입력 2021.03.16 10:57
  • 수정 2021.03.18 09:41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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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

 

양옥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신임회장. 한승호 기자
                          양옥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신임회장. 한승호 기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은 지난 1월 대의원총회에서 양옥희 신임회장을 비롯한 19기 지도부를 선임했다. 전라북도연합회에 이어 전여농 조직 전체를 이끌게 된 양 신임회장을 만나 그간의 삶, 그리고 앞으로의 각오에 대해 물었다.

 

정읍을 거점으로 오래 활동하셨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생소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연합회장을 맡기까지의 여정을 들어보고 싶다.

38살까지 독신으로 살던 도시 사람이 우연히 농민운동 하는 사람을 소개 받아 남편으로 맞게 됐다. 이순봉씨라고, 정읍시농민회를 만들었던 사람 중 하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전주에서 이런저런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했지만 농민회하고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전원일기 속 목가적인 분위기, 그런 게 농촌인 줄 알고 시집을 갔는데, 당시에도 열이면 열 다 반대를 했었다. 나만 제대로 몰랐던 셈이다.

 

농촌에서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나.

지금은 교통이 발달했지만, 정읍 영원면이라는 곳이 좀 오지다. 동네는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슬레이트 지붕 얹은 집이 세 채밖에 없는 빈촌이었다. 운동이 강성이었던 시절, 문익환 목사님부터 해서 수배자들이 들러 가는 일종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음식 솜씨 좋은 시어머니는 간판 없는 식당을 하며 없는 살림에도 농민회 형제들에게 아들 같이 베풀었는데, 집에는 자기 소유 논밭 하나 없었고 아저씨(남편)는 자나 깨나 농민운동 밖에 몰랐다. 남편을 내게 소개해 준 사람도 그냥 농촌에서 농사지어 먹고 산다고만 생각했다더라. 신념이나 사고야 다 좋지만 경제를 배제하고 세상을 산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보육에 관심이 많아 여기서 어린이집을 하고 싶은 꿈도 있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늦은 나이에 자식 셋을 낳고 농가부채에 시달리며 그렇게 농촌에서의 첫 10년을 보냈다. 나중에야 사태를 파악한 친정에서 난리가 났지만 이미 되돌릴 순 없었다(웃음). 스스로도, 고달프다고 피해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그 벅찬 삶의 가운데 지역 활동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기초의원직에 도전할 여성후보가 필요했는데, 전교조 해직교사로 예전에 같이 시민사회 활동을 하던 후배 한명이 식당에서 일하는 나를 우연히 찾아낸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분명 어느 날 전주에서 사라진 그 양옥희는 양옥희인데 머리 질끈 묶고 화장도 안하고 애기들하고 놀고 있으니까, 혹시 저분 전주서 안 왔냐고 확인하더니 벌컥 안고 누나가 이러고 있을 수가 있느냐고, 혼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의원 후보등록 마감을 며칠 남겨놓고 겨우 출마 결의를 했다. 당시 나는 32개 마을을 주말에도 돌면서 결식아동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했다. 면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던 일이었는데, 그 덕인지 첫 번째 선거에서 낙선은 했지만 의외로 선전을 했다. 2010년에도 떠맡다시피 하며 선거를 나갔는데, 단 몇십표 차이로 낙선을 했다. 선거 당일 저녁에는 포털에 당선이라고 먼저 나오기도 했을 정도니까. 그런 과정에서 각개 전투 위주의 당 선거운동 방식에 실망도 많이 했었다. 어쩔 수 없이 맡은 자리에서 무슨 여자가 위원장이냐하는 비아냥까지도 들었다. 통합진보당이 깨지던 2014년을 마지막으로 정당 활동은 전부 끊어버렸다.

 

상심이 컸을 것 같은데, 농민운동 만큼은 놓지 않았다.

7필지, 1만평 정도 수도작을 하는데 순수익이 한 달로 따지면 겨우 50만원 정도다. 아저씨는 농한기에 다른 일을 하고 나도 사회복지사를 하면서 부부가 버는 농외소득으로 겨우 아이들을 키웠는데, 점점 어려워지는 농민 조직의 끈을 나라도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쪼개가며 버틴 것 같다. 다문화가정 지원센터 소속으로 방문교사 일을 하니 차마 회장은 맡을 수가 없어서, ‘자를 달고 사실상 회장 역할을 하며 무려 6년을 정읍시여성농민회 부회장으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려운 형편의 도연합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또 그렇게 전북도회장을 3년 맡아 여기까지 왔다.

 

총연합 회장을 맡은 것도 결국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나.

1년 정도 회장직을 고심하는 시간이 있었다. 전북도연합을 맡을 때도 생업을 반으로 줄이는 결단을 했는데,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의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총연합회장을 맡는 것은 말 그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할 만큼만 하고 싶었지만, 나를 적임으로 생각하는 의견이 너무 강했다. 나는 한 정당에서 선거를 세 번이나 나갔던 사람이지만 도연합을 맡으면서는 오로지 여농 조직만 생각했다. 정치방침을 한번 정했다가 철회한 전여농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 것 같다.

 

각오가 남다를 것 같다.

어떤 계기가 됐던 결국 올라왔다. 회장 선임 이후 첫 인사에서 나는 구성원들에게 우리가 전여농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물었다. 농민운동을 할 수 있는 다른 여성단체도 많은데 왜 이 끈을 못 놓고 고행의 길을 가야 하는가?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정치세력화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여성농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그 길을 택했던 것인데 결국은 우리 것을 만들지 못하고 휩쓸려 가는 모양새가 됐다. 수주작처라고 했다. 우리가 주인된 의식을 다시 가지지 않으면 모든 수단이 쓸모없다. 고생, 고생해서 전담부서와 지역의 여성농업인지원센터를 만들었지만,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일자리 하나 만든 것으로 끝날 뿐이다. 전여농의 주요 사업도 앞으로 중앙에서 벗어나 지역 위주로, 현장의 여성농민을 위하는 활동으로 진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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