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대파 파종을 하면서

  • 입력 2021.03.14 18: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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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엊그저께 내린 비로 들판이 충분하게 적셔지고 남았는데 비가 또 흙을 토닥거리고 있다. 사흘 후에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다. 봄이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마당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수선화가 꽃잎 펼칠 시기를 가늠하며 꽃대를 당차게 세웠다. 흙속의 부산스런 움직임이 감지된다.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날 대파 파종을 했다.

파종하는 일감은 과정이 비슷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플라스틱 포트 상자에 상토를 담는다. 상토를 담은 포트 상자를 겹쳐서 위에서 누르면 자연스럽게 씨앗을 넣을 수 있는 구멍이 만들어지는데 구멍에 맞춰 파종기로 씨앗을 넣고 포트 상자를 들어내서 다시 상토로 씨앗을 덮는다. 씨앗을 덮은 포트 상자를 나란히 놓고 상토가 충분히 적시도록 몇 차례 물을 뿌린 후 비닐을 덮고 부직포까지 그 위에 다시 덮어준다.

이런 과정을 인건비를 지불하는 일꾼들과 같이 한다면 일일이 역할을 따로 주겠지만 품앗이라면 자동 시스템처럼 진행되거니와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이 빠르다는 장점도 있다. 파종기를 들고 씨앗을 넣는 사람은 손놀림이 빠르면서도 꼼꼼한 일꾼으로 구성원 중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진다. 일의 진행 속도는 파종하는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서 빨라지기도 하고 한 짬을 쉴 수도 있다.

일꾼들은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입도 쉴 새 없이 같이 일을 한다. 누구네 개가 새끼를 5마리 낳은 것부터 작년에 대파가격을 누가 제일 잘 받고 팔았는지까지 동네 살림살이가 대충 드러난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사는 올해 대파가격이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이다. 작년에 대파 시세가 좋았으니 올해는 떼로 몰려들어 과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은 진단들이었다. 그러나 농산물 가격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농산물 품목마다 통계 수치를 꿰고 있는 농촌경제연구원이든 종자를 판 농약사 주인이든.

파종한 모종을 유리그릇 다루듯 애면글면 해서 키워 본밭에 심고 가꾸는 과정의 노동은, 시작하기 전부터 짐작할 수 있다.

한여름 땡볕에서 대파 밭고랑에 엎드려 풀을 뽑다 보면 찜질방에서 뽑아내는 것보다 많은 양의 땀이 흐른다. 흐르는 땀이야 대충 닦아내면서 하던 일 계속 하면 되지만 허리와 다리 그리고 옆구리와 손목까지 어디 멀쩡한 구석이 없을 정도로 쑤시고 저리고 아프다. 깜깜해져서야 집에 들어오면 차려주는 밥도 먹기 싫을 지경이 된다. 다시 밥 차리는 노동을 해서 밥상 앞에 앉으면, 숟가락이 20kg 비료 포대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농약 줄을 잡아끄는 일은 또 얼마나 고된가. 물기가 남아 있는 흙에 달라붙어서 당겨지지 않은 줄을 끌다가 어깨 인대가 늘어나는 것은 나중에 해결할 일이고 방제복과 마스크 때문에 지금 당장 숨이 차고 천지가 빙글빙글 도는 어지럼증까지.

파종하면서 시작되는 나의 불안은 고된 노동이 아니라 농산물 가격 때문이다. 대파를 파종하고 모종을 돌보면서 불안도 같이 키우는 셈이다. 사람을 비롯한 여타의 동물들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만났을 때 불안과 공포가 커진다고 한다.

15개 농산물 품목에 대한 기준가격을 설정하고 시장가격이 이보다 낮으면 차액의 80~90%를 보전하는 ‘가격위험완충제도’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척 반갑다. 불안은 그냥 덮어 두고 모종만 잘 키우면 되는, 그런 봄 마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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