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시민아파트⑥ 아파트 동마다 ‘보안관’이 살았다

  • 입력 2021.03.07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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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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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뭔지도 모르다가 시민아파트에 딱 입주를 하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방이 두 갠데 방마다 각각 다락이 하나씩 있었어요. 그땐 가난한 집일수록 애들이 주렁주렁 많았잖아요. 그래서 아마 일부러 다락을 둘씩이나 만들어준 것 같아요. 물론 연탄 때는 부엌도 따로 있고 창문 열면 베란다도 있었고요. 시에서는 공식적으로 ‘11평 아파트’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한양공대 건축과 학생들이 실습 차 나와서 내부 면적을 자세히 측량을 해보더니, 실 평수가 9.1평이래요. 세상에, 지금 생각하면 좁아터진 공간인데, 그땐 거기서 여섯 식구가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두 활개 쫙 펴고 아주 잘 살았다니까요. 맘먹기에 달렸더라고요.”

1969년도에 삼일아파트에 입주해서 30년을 넘게 살았던 한 할머니가, 2001년도에 나를 만나서 들려준 얘기다.

한편 낙산의 시민아파트 28동 105호에 입주한 남원 출신 유재근 씨는, 입주하던 첫날에 경상도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 맞은편 101호의 쥔장이다. 그는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김 중사라고 부르이소. 보시다시피 내는 한 쪽 다리가 없심더. 앞으로 종종 월남전 얘기를 해주꾸마. 비슷한 연배 같은데, 고마 말 놓고 지내는 게 우짜겠능교? 내는 35년생인데….

-나보담 한 살이 밑이구먼. 그라먼, 까짓것, 서로 말 놓고 지내뿔자고.

김 중사를 ‘특별한 사람’이라 한 것은 신체적 장애가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6.25전쟁이나 월남전에 참전했던 ‘상이용사’들의 경우 한 동에 한 사람씩 의무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호수에 배정을 했다. 원호 대상자에 대한 배려 케이스였다. 그런데 상이용사 말고도 특별 배정을 받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었느냐고 묻자 유재근 씨는 귀엣말로 나직하게 ‘보안관이오!’ 그랬다. 보안관?

“우리는 그렇게들 불렀어요. 아파트 동마다 경찰관 한 사람씩을 특별 배정을 했거든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뿐이라면 뭐, 조금 내려가면 파출소도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소문으로는 민심을 정탐하고, 정부 비판하는 사람 없는지 감시하려고 경찰관을 배치했다는….”

시민아파트의 각 동마다 민심을 정탐 혹은 감시하기 위한 경찰관 한 명씩을 입주시켰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다. 낙산지구 말고도 여러 곳에서 착공했던 시민아파트들의 준공(입주) 시기가 유신통치가 시작되는 시기와 얼추 겹쳤고, 이후로 긴급조치가 줄줄이 선포되어서 국민의 기본권이 극도로 억압을 당했으니…그때 시민아파트의 주민들이 ‘보안관’이라고 부르던 그 경찰관들이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킬 만도 하다.

1970년 4월 8일, TV나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있던 사람들, 특히 시민아파트 입주민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오늘 아침 6시 30분경, 마포구 창천동에 있는 와우아파트 제14동이, 갑자기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던 33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4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와우아파트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사건의 충격으로 시민아파트의 추가 건설 사업은 중단되었고, 기존의 아파트들에서는 기둥을 덧세워서 이중으로 만들고, 아파트 앞에다 옹벽을 한 겹 더 쌓는 등 대대적인 보강공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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