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온 돌’과 ‘박힌 돌’이 함께 “복작복작 재미지게 산당께”

‘마을책’ 펴낸 전북 순창군 두지마을 공동체 이야기

  • 입력 2021.03.01 00:00
  • 수정 2021.03.03 17:03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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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2017년 2월 11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북 순창 두지마을 주민들이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7년 2월 11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북 순창 두지마을 주민들이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빌고 있다. 한승호 기자

 

귀농·귀촌이 하나의 선 굵은 경향으로 자리한 동시에, 농촌에서는 전에 없던 유형의 갈등사례 역시 쌓이고 있다. 곳곳에서 고령의 원주민 집단과 외지출신 청년층이 각각 ‘공동체를 무시한 이기주의’와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막무가니식 텃세’를 이유로 서로를 공격한다는 소식은 이제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어르신들과 청년주민들이 합심해 공동체를 이끌고, ‘마을책’까지 펴낸 마을도 있다.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두승리에 있는 두지마을이 그 주인공으로 본래는 10년 전만해도 여느 농촌처럼 노령화 탓에 활기를 잃고 있었던, 전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평범한 마을이었다.

공교롭게도 전환은 위기로부터 왔다. 마을에서는 옛적부터 지내온 당산제를 그만두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것이 차마 전통을 버리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의 불행 속에서 겨우 명맥만 잇는 행사가 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수를 준비하는 여자들의 노고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뿐더러 주민들도 늙어가는 까닭에 제사의 규모와 활력은 점점 소멸로 이르고 있었다. 새해 덕담 한마디 없이 끝나던 당산제는 결국 2012년을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종적을 감춘다.

당산제가 사라져가는 일련의 과정은 당시 마을 내 한 줌에 불과했던 청년 가구들의 각성을 불렀다. 청년들은 당산제의 폐지가 단순히 마을 행사 하나가 없어지는데 그칠 것이 아님을 우려했고, 동시에 공동체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했던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칫 공동체 붕괴의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이 사건이 오히려 청년들의 의기투합을 부르고, 더 많은 청년가구의 귀촌을 부른 것은 마을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청년회 ‘파킹스톤’은 최근 마을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주역이다. 출판사업을 주도적으로 담당한 파킹스톤 회원 김선영씨(왼쪽), 구승회씨(가운데). 정례회의를 위해 두레방에 모인 회원들의 모습(‘복작복작 재미지게 산당께’에서 발췌).
청년회 ‘파킹스톤’은 최근 마을 공동체에 활기를 불어넣은 주역이다. 정례회의를 위해 두레방에 모인 회원들의 모습(‘복작복작 재미지게 산당께’에서 발췌).

“처음에 청년 가구는 네 가구에 불과했을 거에요. 현 이장님 댁 비롯해 몇몇. 그러다가 점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 중 하나고요. 어떤 분들은 바깥에서 우릴 보면서 참 피곤하게 산다고도 하는데 원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자 모였기 때문에 지금 저희 삶의 모습은 참 바람직하다고 봐요(청년회 ‘파킹스톤’ 회원 구준회씨).”

2012년 마지막 당산제를 지낸 뒤 마을에는 청년모임 ‘파킹스톤’이 생겼다. 시작은 비록 굴러온 돌(롤링스톤)이었을지언정, 결국에는 ‘박힌 돌’이 되고자하는 청년들의 강한 의지가 투영됐다. 파킹스톤은 당산제를 대신해 공동체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새로운 문화행사를 기획하고자 했고, 그렇게 두지마을의 상징인 달집태우기 행사가 탄생했다. 피로가 누적된 어르신들을 염려해 초기엔 청년회가 주관해 시작했다.

달집태우기는 당산제와 마찬가지로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세시 풍속이다. 풍물패를 꾸려 마을 곳곳을 돌며 진행하는 지신밟기(귀신을 물리치고 행복과 풍년을 부르는 의식)로 포문을 열고, 종국엔 거대한 달집을 태우며 소원을 비는 농촌 고유의 달맞이 의식이다. 남성들이 거대한 달집에 들어갈 나무와 각종 재료를 모으고, 여성들이 제수상을 준비하면 어르신들은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이엉을 엮는 작업에 동참한다. 아이들도 소원을 적어 곧 태울 달집에 붙인다. 이처럼 마을 전체가 어우러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청년들이 처음 소망한 것과 같이 대부분의 가구가 참여하는 마을 주관의 행사이자 외지인까지 불러 모으는 두지마을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됐다.

달집태우기 행사 연례화를 시작으로 공동체 활성화에 불이 붙자 각종 지원사업을 끌어오기도 용이해졌다. 또 하나의 연례행사 ‘두지마을 연꽃 작은음악회’는 주어진 예산을 토대로 소박하게 꾸민 음악회로, 스스로 행사를 치르고 마을 이름을 알린다는 자부심을 불렀다. 음악회를 비롯해 겨울문화 사랑방, 요가교실 등 마을의 문화사업 대부분은 경로당과는 또 다른 공간에서 주로 열리는데, 마을에 방치돼 있던 농협 폐창고를 개조해 만든 ‘두지마을 두레방’은 주민과 마을을 방문한 손님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사랑방이다.

‘파킹스톤’이 가장 최근에 벌인 일이 바로 마을과 사람들의 기록을 남겨보려는 시도였다. 기록사업은 파킹스톤 회원 구씨가 처음 제안했다. 출판에 발을 들인 과정에도 청년들다운 지혜가 엿보이는데, 우선 도구로 정부의 지원사업을 활용했다. 고용노동부 협의 하에 순창군이 매년 시행하고 있는 ‘지역산업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을 활용해 마을 출판사 ‘잇다’를 세우고, 수령한 초기사업비로 책을 내 마을의 부담을 최대한 줄였다. 공동체의 현재를 기록하고 책을 집필하는 일은 김효진 이장의 아내 김선영씨가 주도했다.

출판사업을 주도적으로 담당한 파킹스톤 회원들을 각자의 일터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구준회씨, 김선영씨.
출판사업을 주도적으로 담당한 파킹스톤 회원들을 각자의 일터에서 만났다. 왼쪽부터 구준회씨, 김선영씨.

 

 

“농촌살이가 어르신들에게 의지하는 게 많아요. 일단 우리를 이쁘게 봐주셔야 하잖아요(웃음).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계속 고민했어요. 우리가 살기 전이면 몰라도 산 이후부터는 마을 역사를 기록할 수 있잖아요. 생각만 있고 정말 이 시점에 꼭 해야 돼, 하는 계기가 없던 차에 좋은 기회(지원사업)를 발견해 시작하게 됐어요.”

마을기록 출판사의 첫 책 이름은 ‘복작복작 재미지게 산당께’다. 코로나19 여파에 다들 농사도 일도 바빠 준비할 시간은 1년이 채 안됐지만, 단 한권의 책으로 마을의 오늘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알찬 결과물이 나왔다. 이곳에 옮겨 간략히 소개한 공동체 활성화 과정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특기를 바탕으로 한 인물사전 및 구씨의 인터뷰·사진을 통해 이곳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심지어는 사랑받는 몇몇 개·고양이까지도)을 모두 기록으로 담았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내용은 김선영씨가 작성한 할머니 세 분의 구술 생애사와 글솜씨 좋은 귀농청년 두 사람의 자전적 글쓰기로, 오늘날 농촌을 대표하는 두 세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대비다. 자전적 글쓰기에 참여한 청년회원 이용희씨(2012년 귀촌)는 공동체성 회복을 생각하던, 먼저 살고 있던 주민들을 보고 이곳에 귀농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에요. 처음에야 자연 경관, 맑은 공기 이런 걸 생각하고 내려올 수 있지만 아무리 환경이 좋고 집을 잘 지어놓는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 결국은 이웃이 좋아야 하고, 그래서 이 마을로 오게 됐어요.”

두지마을 사람들은 이 책을 쓰며 서로라는 비빌 언덕을 공고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연령과 출신을 막론하고 농촌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고, 또 생각해봄직한 좋은 교재를 만들었다. 두지마을의 사례가 ‘마을책’이라는 장르의 지평을 열 것이라는 파킹스톤의 조심스러운 자평에 열렬한 동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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