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시민아파트⑤ 아파트 입주자 제비뽑기 하던 날

  • 입력 2021.03.01 00: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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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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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으세요! 이 포대 속에 동글동글한 구슬이 여러 개 들어있는데, 그 구슬에는 여러분이 입주해서 살 아파트 호수들이 적혀 있어요. 한 사람씩 차례차례 나와서 제비를 뽑으세요!

1969년 12월, 창신동의 낙산시민아파트 28개 동이 완공되었다. 낙산아파트의 경우, 아파트 건축 부지에 살던 사람들을 멀찌감치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시키고 나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입주자들이 삼일아파트처럼 뚝섬 등의 임시거처로 나가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손길로 제가끔 구슬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

-송칠복 씨는 15동 307호!

-그럼 우리 집이 몇 층이지요?

-307호니까 3층이지요.

-그 다음 유재근 씨는 28동 105호!

이 유재근 씨가 누구냐 하면, 전라도 남원에서 상경하여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창신동 비탈언덕에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사촌형의 주선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기둥삼아 반나절 만에 뚝딱 판잣집을 지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 ‘하꼬방’에 사는 동안에 유 씨는 결혼까지 했었다.

“105호를 뽑았어요. 1층 맨 귀퉁이 집이었거든요. 처음엔 그냥 뭐, 다리 아프게 계단 오르내리지 않아서 좋겠다, 그랬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제비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은 거요. 1층을 뽑은 덕에 생계문제가 단박에 해결돼버렸다니까요.”

유재근 씨가 입주했던 105호는 아파트 귀퉁이를 돌아가는 삼거리를 끼고 있는 데다, 베란다 높이가 지면에서 90센티미터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 상대로 장사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베란다에다 좌판을 벌이고는 사탕도 팔고, 수박도 팔고, 라면도 끓여 팔고, 김치도 담가서 봉지에 넣어 팔았다. 2층, 3층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다.

삼일아파트와는 달리 낙산시민아파트의 경우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게 아니라, 통로의 한가운데쯤에 1개 층 12세대의 화장실이 따로 몰려 있었다. 그러니까 화장실에 가려면 일단 집밖으로 나가서 자기 호수 표시가 된 화장실까지 걸어가야 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근 할아버지는 처음 시민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세상을 다 얻은 양 기쁘더라고 회고한다.

주민들이 입주를 했다고는 하지만 편의시설이 완비되어서 들어가 산 것은 아니었다. 전기의 경우, 입주자들이 제가끔 전선을 사다가, 아파트에서 70여 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전신주에까지 각자 연결해서 사용해야 했다. 그러자니 아파트마다의 창문 틈으로 뻗쳐 나온 전깃줄들이 허공에서 얽히고설키어서, 제비들도 숨바꼭질을 하며 날아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그처럼 높은 지대에다 수돗물은 어떤 방식으로 끌어다 댔을까? 1970년대에 서울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린 적이 있는데, 북한 대표 한 사람이 산중턱에 지어진 금화시민아파트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높은 데서는 수돗물을 어떻게 마시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낙산 언덕위에 거대한 물탱크를 설치했어요. 그리고 창신3동사무소에 수압을 높여주는 가압장이 있었거든요. 꼭대기 층 살던 사람들은 수압이 약해서 물 한 통 받으려면 한참 걸리기도 했지만 다른 층에서는 큰 불편 없었어요. 아, 참, 낙산의 물탱크 주변엔 울타리를 치고 감시자를 배치해서 보초를 세웠지요. 누군가 독이라도 타면 큰일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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