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고추씨를 넣으며

  • 입력 2021.02.01 00:00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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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전남 구례)

고추모종 하는 일은 다른 모종을 만드는 일보다 일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기까지 하다. 따뜻한 방바닥에 쟁반을 깔고 물에 담가 둔 씨앗을 스타킹에 넣어 납작하게 펴놓고 수건으로 덮고 얇은 옷가지로 덮어둔다. 너무 더워도 안 되고 너무 따뜻해도 안 된다.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뾰족히 뿌리부분이 부풀어 오른다. 이때가 되면 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모판이나 구멍 개수가 많은 판에 씨앗을 넣어야 한다. 늦으면 애써 싹 틔운 것이 떨어져 버리기 일쑤다. 이렇게 한 달 이상 전열온상과 부직포를 동원해 최대한 따뜻하게 키워내면 가운데 손가락만큼 자란다. 이때 다시 구멍이 큰 모종판으로 이식해야 한다. 그렇게 80~90일을 키우면 이제 본격적으로 본밭에 들어간다.

모종을 키우는 동안 본밭을 준비해야 한다. 유기질 퇴비를 넣어야 하고 물길을 다시 손봐줘야 하고 크게 자랄 것을 바라며 고춧대도 긴 것으로 박고 제초매트까지 깔아주면 고추모종을 맞이할 준비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작년에 했던 과정을 되새긴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걱정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30여년이 다되어 처음으로 고추농사를 시작하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지난해와 다르게 우려와 걱정이 교차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50여일 넘게 계속되었던 장마는 송이송이 맺혀있던 고추의 꽃들을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뜨렸다. 그래도 나무는 열매 맺지 못하니 키가 쑥쑥 커나가고 고춧대 크기만큼 성큼 성큼 커나갔다. 자연을 닮은 사람들(친환경 유기재배) 방식의 고추재배에 한창 신이 날 즈음 댐 대량 방류와 홍수로 인한 둑 터짐은 우리 고추밭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만 하루를 물에 잠겨버린 고추는 시름시름 앓더니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청양고추가 질긴 놈이라는 건 처음으로 알았다. 서리 내릴 즈음엔 청양고추를 제외하고 2,000주 심은 일반 고추는 겨우 50여 그루가 남아있었다. 살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는 아이들은 내 손으로 뽑아내고 싶지 않았다. 남아있는 고추의 삶이 내 삶과 묘하게 닮은 듯했다.

언제나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낼 때는 경건하게 된다. 아이를 낳았을 때 기분처럼 그래 우리 함께 잘살아 보자꾸나. 내가 보살펴 주고 하늘이 보살펴 주고 그렇게 크는 거야 주문을 외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일상화 되어버린 기후위기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에 많은 회의감을 준다. 애써 키워낸 작물들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 모든 책임은 농사를 지었던 농부의 몫이다. 재해보험도 있고 갖가지 보상책이 있긴 하지만 보험에 가입하는 조건이 까다로워 대상이 많지도 않으며 쥐꼬리 만한 정책으로 다시 일어서기엔 역부족임을 실감했다.

어차피 돈도 안되는 농사이니 그곳에 기후위기에 대처할 태양광시설로 일확천금을 만져보라는 법과 제도가 우후죽순 이야기되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 하는 농지법이 있음에도 임차농이 60% 이상을 농사짓고 있다. 어떻게 된 정책인지 이제는 임대차계약서도 잘 안써준다. 애써 직불금을 포기하고 농사짓는 농민들이 기후위기 정면에 서 있다.

씨앗을 넣으면서도 씨앗 수만큼의 온갖 상념에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 어디서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 얽히고 얽힌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작년 우리 동네는 사람보다 소들이 더 많은 언론에 보도되었었다. 소들이 걸어서 절까지 갔다느니 남해바다의 섬 어딘가에 우리 동네 소들이 떠내려왔다는 등 다들 소들이 우직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미담에 쌍둥이 소가 태어났다는 소식까지, 그리고 올해는 흰 소의 해라며 묵묵히 우직하게 나아가면 좋은 일이 저절로 생겨날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뭔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된 일이 있기는 했을까?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일들이 있기는 한 걸까?

걱정만 늘어놓지 말고 뭔가 방법을 찾아내고 즉시 실행에 옮기면서 시행착오를 거치고 더 나아간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걱정을 해결하는 해법마저 다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냥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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