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시민아파트① ‘시민아파트’엔 특별한 시민이 살았다

  • 입력 2021.01.2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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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2001년 가을.

서울 시내 중심부의 광교 쪽에서 3.1고가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옛 청계천변 오른편에 평화시장이 나타난다. 평화시장을 지나 청계천 8가쯤에 이르면, 고가도로 아래쪽의 도로변을 따라, 언제 지었는지 그 연륜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퇴락한 잿빛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3.1고가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속에서 두 남자가 주고받는다.

-저게 뭐 하는 건물인지, 맨날 지나다녀도 도통 모르겠어. 아마 20년도 넘게 저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데?

-20년이 뭐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봤으니까 못해도 30년은 됐을걸. 옛날에는 무슨 아파트였던 것 같은데….

-아파트? 지금도 저 안에서 사람이 산다고?

-글쎄. 도심지 도로변에 저런 낡은 건물을 방치해두는 걸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건물인 것 같기도 하고….

승용차 속의 두 남자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는 그 건물들이 바로 시민아파트인 ‘3.1아파트’다. 1960년대 말, 대통령 박정희와 ‘불도저 시장’으로 유명했던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이, 무허가 판자촌을 정비하고 무주택 서민에게 11평형의 시민주택을 마련해 준다는 취지로 야심차게 추진했던 사업이 바로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1969년 2월에 청운동에서 첫 삽을 떴던 것을 시발로 금화아파트, 동숭아파트, 낙산아파트…등의 순으로 서울의 여러 지역에서 맹렬하게 추진되었다.

그런데 1970년 4월에 창천동에 세웠던 와우아파트의 1개 동이 입주한 지 한 달 만에 와르르 무너져서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가 발생했다. ‘철근 70개가 들어가야 버틸 수 있는 아파트 기둥에 단 6개만 넣어서 시공했다’는 당시의 언론보도가 상징하듯이 무허가, 뇌물, 자재 빼돌리기, 빨리빨리 등 그 사건은 가히 부실공사의 총화가 빚은 참사였다.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와우아파트 사건으로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은 전면 중단되었고, 첫 착공 4년만인 1973년부터 단계적인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총 430여 개 동 1만7천여 가구에 달하던 시민아파트는 이후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내가 취재에 나섰던 2001년에는 3.1아파트 12개 동만이 남아 있었는데, 1천여 세대가 살고 있던 그 아파트 역시 재개발 계획이 추진 중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이야 돈이 없어서 오도 가도 못하니까 쓰러져 가는 이 아파트에 아직 남아 있을 수밖에. 그래도 우리 집은 차가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우리 앞뒷집 사는 노인네들은 어쩌다 아들딸이나 사위가 찾아오면 차 댈 데가 없어서 먼 데 주차장에다 대고 한참을 걸어서 오기도 하고… 불편한 게 한두 가지여야지.”

3.1아파트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얘기다. 60년대 말에, 무허가 판자촌에 살고 있던 빈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아파트 건립을 추진했던 당시의 정책 당국자들은, 바로 그 시민아파트 입주자가 뒷날 ‘자가용 승용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그 시절 특별시의 시민아파트에 살았던, 매우 특별한 시민들의 얘기를 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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