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산다는건] 가마솥에 누룽지

  • 입력 2021.01.17 20:25
  • 수정 2021.01.17 23:31
  • 기자명 최외순(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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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새해가 밝았다. 새해부터 강추위가 기승이다. 주변에 물이 고인 곳마다 꽁꽁 얼어붙었다. 이쯤 되면 우리 집 삼형제는 빙판 위로 달려들 듯도 한데, 추위가 워낙 매서운지 아이들도 집 밖으로 잘 나서지 않는다. 거실 창에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 풍경은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드문드문 보인다. 그마저 없었다면 너무 시려 보일 것만 같은 겨울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예전 시골마을에는 저녁이면 집집마다 피워내는 굴뚝 연기로 저녁때를 알리고, 그 자욱한 불 냄새가 저녁밥상을 기대하게 했다. 정지(경상도 방언으로 부엌을 말함)에는 밥을 짓기 위한 가마솥에 불이 지펴 지고, 아래채 아궁이에는 소여물이 큰 가마솥에서 푸짐하게 끓어 넘치고 달큰한 풀내음을 풍긴다.

소마구에 묶인 소들은 고삐가 당겨지도록 머리를 내밀고 그것도 모자라 혓바닥을 내밀어 허공을 향해 핥아 내느라 침을 줄줄 흘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먼저 소와 돼지에게 여물을 주고 어둠이 툭 내려앉을 즈음 가족은 저녁밥상에 앉는다. 얼음 동동 동치미와 살얼음 낀 배추김치, 무김치, 무말랭이, 삭힌 깻잎김치, 된장에 콕 박은 고추장아찌, 시래기가 질퍽하게 조려진 된장찌개는 거의 매일 나오는 찬들이다.

여기에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남은 숯에 살짝 구워낸 김이나 조기, 고등어가 오르는 날이면 코와 혀끝에서 환호하는 찬이 된다. 사실, 기본이 되는 이런 먹거리는 엄마의 겨울준비의 결과였을 것이다. 사남매를 키우고 살다 보니 쌀이 푹푹 줄어든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 옛날 더 뛰어다니고 그래서 밥그릇도 크고 더 먹어야 했던 시절, 엄마들의 쌀독은 늘 공허했을 것만 같다.

가을, 겨울 내내 준비해서 겨울을 든든히 하게 했던 엄마의 찬은 못 따라가더라도 푸성귀가 드문 겨울을 잘 지내려면 올해도 김장을 해야 했다. 배추 작황이 안 좋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 몸통보다 큰 배추를 부여잡고 십자로 칼집을 잡아 끙끙대며 염장을 했다.

그동안 김장을 저장하는 장독을 씻고 소독하는 일은 남편의 몫이 된다. 이를 위해 가마솥을 빌려와 불을 때고 물을 끓여서 열탕소독을 하고 또 가마솥을 씻어서 다시 불을 지펴 젓갈을 달여 내고 또 가마솥에 물과 배추 시래기를 넣고 데쳐서 겨울 내 먹을 우거지를 마련하고 마지막으로 맑은 물로 열기가 있을 때 깨끗이 씻어낸다. 이렇게 하루 종일 불 피워진 가마솥 아궁이 숯불은 빨갛게 달궈져 뭐든 구워보고 싶게 충동을 일으킨다.

약속한 듯이 아이들은 집에 뛰어 들어가 고구마를 가져오고 나는 부엌에서 생김을 가져 나온다. 또 남편은 간고등어를 사러 간다. 가마솥 하나로 효율적인 조리가 이뤄진다. 그 옛날처럼 구들장이 놓인 곳에 가마솥이 걸렸다면 더 좋았을 것만 같은 아쉬움이 들지만 현명한 살림을 한 듯 뿌듯함을 준다.

멀지 않은 옛날, 가마솥에 밥을 하고 그 뜸으로 호박잎, 우엉잎을 쪄내고 때론 계란찜이 나오고 다 된 밥을 퍼내면 노릿하고 꼬들한 누룽지가 남겨지고 물을 넣어 숭늉을 지었다. 그것도 모자라 한 번 열기에 달궈진 가마솥은 쉽게 식지 않아 밤에는 고양이가 솥뚜껑 어디쯤 베고 아득한 잠을 잘 수 있게 한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고 이렇게 연결된 삶을 인간은 살아왔다.

그 여운이 농촌마을에 자리하고 있으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오를 수 없을 만큼 삶의 방식은 변화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개발되고 발전해온 많은 것들이 단절되고 버려지고 있다. 사람이 사라져가는 농촌마을, 공동체는 와해되어 가고 있다.

바쁘게 살아가고 생산하고 소비하며 사는 지금, 오히려 좀 흩어지고, 느리게 연결되어 우직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찾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가마솥에 누룽지 맛을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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