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⑦ 이용사 면허시험

  • 입력 2021.01.10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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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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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끝자락, 김호면은 신설동 무허가 이발관에서의 1년 동안의 ‘기술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해마다 3월이면 이용사 면허시험이 치러졌는데, 이발소 근무 경력이 3년 이상 된 사람에 한해서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따라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그가 꼬마시절을 보냈던 광주의 그 이발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면허시험을 하루 앞둔 이듬해 3월 어느 날, 주인이 일찌감치 영업을 끝내고는 이발소 식구들을 불러 모아놓고 목청을 다듬었다.

-내일은 우리 일선이발소에 큰 행사가 있는 날인데, 다들 알고 있지? 5년 전에 우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왔던 김호면이가, 드디어 내일 이용사 면허시험을 보게 됐다. 시험 잘 보라고 내가 이발 기구 한 세트를 장만했다. 자, 받아라. 뭣들 하고 있어. 모두 박수!

그런데 김호면의 면허시험 응시를 격려하는 자리엔 이발소 식구 말고도 단골손님 한 사람이 끼여 있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김호면이 시험장에 데리고 갈 ‘지정 손님’이다.

“모든 응시자는 실기시험을 치르는 데 필요한 이발 기구 일체를 스스로 준비해가야 돼요. 뿐만 아니라 시험장에서 머리를 깎고 다듬고 할 대상, 즉 지정 손님 한 사람씩을 직접 구해서 동반하도록 돼 있어요. 아무나 데려가면 안 되고 우선 대그빡이…아니, 머리통이…아아, 두상이 굴곡 없이 잘 생기고 머릿결도 이발하기 좋은 사람으로 골라서….”

대개는 이발소 주인이 단골손님 중에서 맞춤한 사람을 물색해서 응시자에게 딸려 보냈다.

다음 날, 이용사 면허시험이 치러지는 농촌진흥청 강당엔 긴장이 감돌았다. 이발의자들은 ㅁ자 형태로 배치되었는데, 한 쪽 면에 열 명씩 40명이 1개조가 되어서 동시에 시험을 치렀다. 심사위원들은 이발조합의 베테랑급 이발사들이었다.

-자, 응시자 여러분은 각자가 모시고 온 지정 손님을 상대로 이발을 시작하세요! 면도는, 수염은 밀지 않고 뒷면도만 합니다. 제한시간은 15분입니다. 시이작!

“와, 무지하게 떨리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무난하게 잘 치렀어요.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이발해 놓은 상태를 점검하며 채점을 하는데…면도를 하다가 실수해서 지정 손님의 귀나 뒷목에 피가 조금이라도 났다 하면 무조건 빵점이에요.”

평소 이발관에서는 능숙하게 잘하던 사람들도 시험장에서는 긴장감 때문에 손이 떨린 나머지, 면도하다 피를 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 이발사는 대단한 인기 직종이었기 때문에 경쟁률이 20대 1을 넘을 만큼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재수 삼수는 부지기수였고, 오륙십 대의 경력 많은 사람들도 낙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도청 게시판 앞은 응시자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응시자가 소속된 이발소 식구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드디어 게시판에 방이 붙었다. 김호면은 자기 이름을 찾느라 위아래로 눈 더듬을 하고 있었는데 일선이발소 주인이 소리쳤다.

-987번 김호면, 있다! 있어!

합격이었다. 서민들이면 누구 할 것 없이 핍진한 가난에 고통 받던 그 시절, 이용사 면허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평생 밥줄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김호면의 경우, 열다섯 어린 나이로 고향을 떠나와 5년 동안이나 온갖 고초를 겪어낸 뒤에 얻은 결과였으니 그 감격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 해 면허시험 합격자 중에서 그가 최연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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