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나의 사랑 여성농민

  • 입력 2021.01.10 18:00
  • 기자명 강정남(전남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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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남(전남 나주)
강정남(전남 나주)

어려서는 꿈을 꾸고 꿈을 일궈가라고 들었다. 학교에 가면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은 아니더라도 다들 한 꿈씩 꾸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책읽기를 좋아하고 혼자 놀기를 좋아해서 누가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첫 번째는 소설가가 되는 거, 두 번째는 가수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면 아빠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기껏 꾼다는 꿈이 얼마나 허황돼 보이는지 그저 허허 웃고 넘긴 것 같다. 다들 선생님, 판사, 뭐 그런 정도는 돼야 꿈이었는데 앉아서 관찰하고 공상하고 책 읽고 그렇게 혼자 놀았던 그 아이는 이제 50이 넘은 그저 그런 아이엄마가 됐고 치열하게 살던 청춘의 꿈과 희망도 늙어가 버렸다.

어쩌다 어른이 아니라 어쩌다 농촌에 시집와서 마냥 자연이 신기하고 그랬다. 배나무를 보고도 중얼중얼, 고추를 보고도 중얼중얼, 그렇게 자연과 중얼거리며 하다 보니 이제 몸이 그만하고 싶다 해서 그만뒀다. 아파 죽어도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처지, 정말 안하고 싶었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부차적인 존재, 도대체 나의 존재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꿈꾸는 농사일과 너무 다르고 자꾸 농산물을 상품으로 보는 내가 싫어졌다. 농사만 지어 생활을 해나갈 여력이 나오지 않는 이 깜깜한 동굴 같은 농사일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물론 사람이 자기 뜻대로 다 살 수는 없어도 제 뜻과 맞지 않으면 포기라는 선택도 필요한 것 같다. 포기했다고 낙오자도 아니고 그냥 내 인생이니까 별로 아쉬울 것도 없다.

겨울되면 호박죽 끓여먹고 동지라고 팥죽 쒀서 나눠먹고 동지섣달 긴긴밤 고구마 구워먹는 재미까지 많은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해줬다. 지친 노동 끝에 불어오는 살랑살랑 바람 한 점의 고마움, 씨앗을 심고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불쑥 커 자기 좀 보라고 이파리를 흔드는 생명체를 보고 어찌 감탄이 쏟아지지 않겠는가!

모든 게 고맙고 소중한 추억이 돼버렸다. 여성농민회를 한 지 근 30여년, 엄마들을 보고 눈시울 적신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 돌아가신 분들이 꽤 많은, 그렇게 돼버렸다. 힘들 때 같이 함께한 사람들, 부대끼며 가더라도 함께 했던 언니들이 있기에 아직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

고맙다. 나의 정치적 신념은 여성농민이었다. 여성농민이 참된 해방이라 여기는 그때, 구속과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영혼의 친구로 살 수 있는 그런 때를 그리며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 나의 사랑 여성농민!

그래서 지금도 여성농민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하고 있어 사실 행복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여성농민들은 땀 흘리며 일하는데 나만 시원한데서 있으니 미안하게 말이 안 나온다. 더위와 추위와 비바람과 온갖 자연재해와 맞부딪치며 일하는 여성농민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그 덕분에 우리가 싱싱한 채소와 과일, 곡식을 먹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50중반임에도 젊은이 축에 들어가는 이 늙어가는 농촌에 제발 활력이란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청년농 육성 정책도 좋지만 그 내용 속에 청년여성농민정책도 좀 신경을 더 써줬으면 싶다. 안전문제며 거주문제며 농촌이 좋지만 환경이 불안해서 망설이는 청년여성농민들이 있다는 얘길 들어서다.

이제껏 농사짓고 살아온 여성농민과 농민에 대한 대접은 좀 제대로 해야 젊은 농민도 ‘아! 농촌에서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고 살면 나이 들어 그 대가를, 농업에 대한 여러 가지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구나! 노후가 걱정 없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 아닌가!

지금 있는 농민에게 잘하면 저절로 농촌엔 젊은 청년농민이, 청년여성농민이 들어올 것이라 믿는다. 부디 여성농민이시여, 한 해 한 해 더해가도 건강하시고 힘내시고 꼭 행복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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