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초지에서 목초만 생산되나?

  • 입력 2021.01.01 09:00
  • 기자명 안경아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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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아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안경아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초지 위에서 말들이 풀을 뜯는다. 제주도 516도로로 한라산을 넘다보면 나타나는 제주 마(馬)방목지가 그곳이다. 가히 이국적인 풍경이다. 관광객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에 차량을 세운다. 탁 트인 초지 경관을 즐기고 이를 사진으로 남긴다.

2030세대들이 즐겨 찾는 곳도 있다. 초지 위의 나무 한 그루(왕따나무), 1960년대 목장 숙소(테쉬폰), 방목한 젖소의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 가게(우유부단), 초지 위의 고깔 모양 오름(궷물오름) 등이다. 초지 경관은 SNS에 사진으로 포스팅되고 웨딩사진으로 남는다.

초지는 목초와 사료작물이 재배되는 토지를 말한다. 농가는 초지에서 자란 목초로 소, 말, 양, 염소 등 가축을 기른다. 그러나 제주 마방목지, 왕따나무, 테쉬폰, 우유부단, 궷물오름의 초지에서 목초만 생산된다고 볼 수 있을까? 다양한 초지 경관이 사람들에게 즐길 거리가 되고 있는데 말이다.

제주도의 이런 초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제주도 초지는 2009년 1만7,331ha에서 2019년 1만5,874ha로 감소했다. 지난 10년 동안 여의도 면적의 5배에 달하는 초지가 다른 용도로 전용됐다.

초지 전용은 왜 일어나는가? 그동안 소와 말의 사육두수는 증가했지만, 증가한 소와 말은 그만큼의 수입 건초와 곡물을 먹고 자란다. 이에 초지는 목장으로서 활용도가 낮아져 방치되다가 매각된다. 중국 자본과 JDC에 매각된 토지는 골프장, 리조트, 타운하우스 등으로 개발된다.

초지 기능이 상실된 대부분은 농지로 전용되고 산림으로 환원된다. 월동무 가격이 한파로 몇 차례 폭등하자, 농민과 상인들은 재배면적을 늘리고자 한라산 중산간 지대까지 올라와 무 종자를 파종한다. 초지의 전용과 농지 불법전용은 가격폭락으로 출하되지 못한 월척 같은 월동무가 이 밭 저 밭 눈 속에서 얼어가는 이유 중 하나다.

올해 제주환경운동연합은 마을공동목장 10곳의 자연생태계를 조사했다. 마을공동목장은 초지, 숲, 습지로 구성돼 있고,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한다. 조사 결과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지정된 긴꼬리딱새(2급), 비바리뱀(1급), 두점박이사슴벌레(2급), 애기뿔소똥구리(2급), 순채(2급) 등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초지가 전용되면 멸종위기 야생생물의 개체 수도 줄어들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한라산 중산간 지대 초지에서 함양된 지하수로 농사도 짓고, 생활용수로도 쓴다. 함양된 지하수의 일부는 삼다수로도 팔린다. 올해 제주시 용역결과에 의하면, 제주시 초지 면적의 26.1%가 지하수자원보전지구 1·2등급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초지가 생태계와 지하수 보전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제주도 초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탐라목장, 조선시대 산마장을 거쳐 일제강점기 마을공동목장, 새마을운동시기 협동축산단지 등의 운영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목장조합은 1991년까지 전문 목장관리인인 목감을 고용해 운영됐고, 당시 목감이 나타나면 날뛰던 말이 그대로 차분해졌다고 한다. 목감이 없을 땐 목장조합원들이 돌아가며 소를 지키고, 밤새 드넓은 목장만큼 커다란 하늘의 별을 헤아렸다고 한다. 초지는 목축 유산과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논의 다원적 기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식량공급, 홍수조절, 습지 생태계 보존 등 다양하다. 반면, 초지의 다원적 기능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논 직불금은 ha당 100~205만원인 반면, 초지 직불금은 ha당 45만원에 불과한 이유다.

공익형 직불제의 기본형이 시행단계에 있다. 앞으로 공익형 직불제의 가산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면, 초지에 대한 가산형 논의는 언제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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