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l 2020년에도 농민들은 길바닥에 쌀을 쌓는다

[창간 20주년 특집] 20년 전 한국농업 그리고 오늘

  • 입력 2020.11.15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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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2001년 11월 13일 ‘전국농민대회’는 2만여 명의 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의 양곡 정책 실패를 강력히 규탄했다. 경찰과 맞부딪힌 시위대에서 부상자가 60여명이나 나올 정도로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2001년 11월 13일 ‘전국농민대회’는 2만여 명의 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의 양곡 정책 실패를 강력히 규탄했다. 경찰과 맞부딪힌 시위대에서 부상자가 60여명이나 나올 정도로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한국농정>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2000년 11월 창간호부터 2001년 12월까지 본지의 지면을 돌아보고자 한다. 20년 동안 450만명에 달하던 농민의 숫자는 300만명도 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당시의 농업계 현안이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이에 본지는 20년 전 농업계를 조명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01년은 당시 용어로 ‘논농업 직불제’, 즉 쌀 직불제가 처음 시행된 해였다. 점점 어려워지는 농업 현실 속에서 농가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새롭게 마련한 제도였지만 지급기준이 ha당 25만원 수준에 2ha까지만 지원했고, 또 산지 쌀값의 변동에 관계없이 고정금액을 지급해 등장 당시부터 실효성에 물음표가 붙었다. 공교롭게도 직불제 원년에 쌀값이 대폭락하고 만다.

그해 수확기가 다가오자 쌀 생산량 증가율이 심상찮다는 분석이 이어지며 농촌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전국에서 수매량과 가격을 확정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얼마 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확정 발표한 당시 쌀 생산량은 529만1,000톤으로 평년 대비 2.9%, 전년 대비로는 4.2%나 많은 양이었다. 봄 가뭄으로 모내기가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9월 이후 기온과 일조량 조건이 워낙 좋았고, 특히 매년 1~2차례씩은 겪었던 태풍 피해가 아예 없었던 점이 컸다.

쌀이 넘쳐나자 각지의 농협미곡종합처리장(RPC)들은 관할 지역을 내팽개치고 소재지 읍·면의 쌀만 처리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이에 가장 믿었던 판로가 사라진 농민들이 많았다. 경기도 안성에서는 농협에 쌀을 넘기지 못한 칠순의 한 농민이 민간업체에서도 수매를 거부당하자 그길로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농민들은 쌀 생산량이 적은 산간지방으로 직접 쌀을 팔러 다니는가 하면 소위 방앗간에 헐값으로 벼를 투매할 수밖에 없어 악순환이 지속됐다.

당시에도 전국에서 세가 가장 컸던 양대 농민단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은 전격적으로 어깨를 걸고 연대 투쟁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당해 10월 하순에 일제히 ‘농업인의날(11월 11일)’ 행사 불참선언을 한 뒤 각각 11월 13일, 11월 21일에 전국농민대회와 총궐기대회를 열어 농가소득 보전에 뒷짐인 정부와 농협중앙회를 강력히 규탄했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두 농민단체는 쌀값 보장을 위해 서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전력으로 투쟁했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두 농민단체는 쌀값 보장을 위해 서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전력으로 투쟁했다.

여의도에서 열린 ‘쌀 생산비 보장, WTO 쌀수입개방 반대, 개방농정 철폐를 위한 1차 전국농민대회’에는 2만여명의 농민이 몰렸다. 대회 직전 정부는 40kg 당 시가매입 가격을 전년 대비 5,000원 이상 떨어진 5만2,000원 수준으로 책정했고, 농협도 정부의 손실보전 약속을 전제로 이를 받아들였다.

고 정광훈 당시 전농 의장은 대회사에서 “연초에는 증산 정책으로 나서다가 8월에 들어서야 재고가 많다며 이를 철회했다”라며 “정부는 또 WTO에서 허용하는 물량조차 수매하지 않는다. WTO 모범생으로 남고 싶어 하는 정부 때문에 죽어나는 건 농민들 밖에 없다”라고 분노했다. 이날 집회는 민주당사, 농협중앙회로 진출하려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결국 6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한 유혈 사태로 기록됐다.

그해 11월 20일까지 전농 소속 45개 농민회가 전국의 시·군청, 농협 앞에 적재한 쌀만 15만2,800여 가마였다. 한농연도 적재 투쟁을 진행했기에 실제로 쌓인 쌀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착잡한 현실 속에서 11월 27일 창간 1주년을 맞은 <한국농정>은 ‘농정신뢰 회복 급선무다’라는 제목으로 1면을 시작하는 1주년 기념특집호를 냈다. 쌀문제 해법과 농협개혁안, 농가소득 안전망 구축 방안을 자가 분석과 전문가 의견을 통해 내놓았다.

이 해 쌀 대란은 쌀 직불제에 ‘목표가격’과 ‘변동직불제’라는 가격안정제도(2005년)를 추가하게 된 단초가 됐다. 완벽하진 못했지만 그나마 가격 지지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던 이 안전장치조차 공익형직불제를 도입한다는 명목 아래 지난해 폐기가 결정됐고, 바로 올해부터 쌀 농가들의 소득 불안정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번엔 반대로 생산량이 감소해 자연스레 쌀값이 올랐지만, 정부가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재고미를 방출할 경우가 문제다. 농민들은 떨어진 수확량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높은 시장가격으로 보전할 수 없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쌀 농가소득을 시장에 일임하기로 결정해놓고도 시장가격을 조정하려는 시도를 농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단법인 전국쌀생산자협회는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농민들은 쌀값이 올라도 생산량이 적어 걱정인데 정부보유곡 방출로 쌀값이 하락한다면 농민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라며 “공익형직불제 지급 대상 농지와 농민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고, 예산 증액을 통해 선택직불제를 대폭 확대해 진정한 공익형직불제로 개편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20년이 지나도록 쌀 가격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쌀 주산지 전북·전남에서는 올해도 ‘수확기에 가진 것이라고는 쌀 밖에 없는’ 농민들의 쌀이 길바닥에 쌓이고 뿌려졌다. 팔아서 소득으로 바꿔야 할 농산물을 엄한 곳에 쌓는 비극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한국농정'은 2001년 11월 27일 창간 1주년을 맞아 29일자로 1주년 기념특집호를 냈고, 여기에는 쌀문제 해법 등 우리 농정이 나아갈 방향을 전 지면에 걸쳐 제시했다.
'한국농정'은 2001년 11월 27일 창간 1주년을 맞아 29일자로 1주년 기념특집호를 냈고, 여기에는 쌀문제 해법 등 우리 농정이 나아갈 방향을 전 지면에 걸쳐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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