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이삭줍기

  • 입력 2020.11.15 18:00
  • 기자명 최외순(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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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11월이 되고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가을걷이를 해야 함으로 몸과 마음은 바빠진다. 벼와 사과를 제외하고는 얼마 되지 않는 농사지만 봄에 심어둔 작물들이 제법 일거리가 된다.

밭에 풀 반 들깨 반. 지난 7월 많은 비에 토사와 함께 쓸려온 도둑가시풀이 왕성한 번식을 해 그나마 들깨 고랑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들깨를 반나절 찌고 나니 온몸에 도둑가시(풀씨)가 붙어서 마치 큰 도깨비 방망이가 된 기분이다. 도둑가시가 별거냐 꿋꿋이 들깨를 찌어 모아서 갑바 위에 쌓아두고 두드리면 떨어지는 들깨소리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들깨향은 코끝에서 머리까지 기분 좋은 상쾌함을 전달한다.

오직 내가 들깨를 두드리는 ‘착착착’ 소리와 ‘샤르르르’ 흘러내는 들깨의 흐름, 가을볕의 다정함이 풍요로운 가을을 그대로 안겨준다. 이 익숙한 소리가 주는 아련한 기억과 느낌은 어린 시절 깨를 털던 엄마 곁에 안아서 쫑알거리던 그 시간으로 데려다 준다. 어쩌면 그 기억 때문에 이 일이 더없이 내게 충만함을 주는 지도 모르겠다.

한편, 아이들은 지난 6월에 심어둔 고구마를 캐는 일에 여념이 없다. “엄마 아빠는 바쁘니까, 너희들이 수확해야 산돼지한테 안 빼앗길 수 있다”라고 얘기를 해뒀더니, 형제는 매일매일 학교에 다녀와서 고구마를 캔다. 요령 없는 호미질이 고구마에 상처를 입히지만 그 덕에 두 컨테이너 가득 넘치게 수확됐다. 올 겨울 우리가 먹을 고구마는 확보된 셈이다.

10월에 꼬박 벼 수확에 매달렸던 남편은 올해 추수를 일찍 마무리하고, 농지 지주들에게 보내는 도지와 쌀 주문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특히, 올해 1,800평가량 심은 토종벼 5종과 씨앗용으로 빼놓은 볏단은 많은 일거리를 동반한다. 아직도 종류별로 훑고, 털고, 가리는 일이 남았다.

특히, 토종쌀은 일반 정미소에 가면 다른 쌀과 섞이고, 한 번에 도정하는 양이 적어서 바쁜 시기에 정미소에 가면 꺼려해 올해는 소형 정미기를 장만했다. 소량 도정도 가능하고 원하는 분도(깎임 정도) 정미가 가능하니 좋긴 하지만 풀과 함께 키운 토종쌀이니 잡티가 완전하게 다 걸러지지 않는 것이 고민이다.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오고 스산한 기운마저 도는 시골마을, 짧아진 해가 산에 기울어질 즈음 넓은 운동장이 된 빈 논에서 남편은 아이들에게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줍고 손으로 훑어보는 것을 놀이삼아 가르쳐준다. 의외로 아이들은 논바닥을 내려 보며 이삭줍기에 열심이다.

이삭이 모여 쌀밥이 되고, 얼만큼 모아야 밥 한 그릇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삭을 보며, 밥의 소중함과 농사지어 살아간 아빠 그림자를 기억해 내 농민의 삶을 귀하게 여길 수 있다면 그보다 보람된 것이 있을까.

어김없이 다가온 2020년 겨울, 나이 한 살을 더해가며 가속도가 붙는 듯 세월의 흐름도 빠르다. 세월이 많이 흐른다 해도 쌀 한 톨의 소중함이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다음해도 우리의 이삭줍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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