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109] 누가 하나

  • 입력 2020.11.08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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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나의 작은 과수원은 이제 농한기로 접어들었다. 겨울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엔 수로를 정비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지하수 모터가 얼지않게 이불이라도 덮어 씌우는 일, 농막으로 연결돼 있는 물관에 열선을 감아 놓는 일, 작은 분무기나 예초기의 배터리를 빼내 농막 안에 잘 보관하는 일, 동력분무기와 관수모터 내의 물기를 빼내는 일, 농기구들을 물로 잘 씻어 보관하는 일 등 자잘한 일들만 하면 된다. 그리고 11월말 경에 퇴비를 넣으면 금년 농사일은 마무리 될 것 같다.

이렇게 장황하게 나열하는 것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농한기임에도 겨울을 나기 위해 할 일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나같이 팔 물건도 없는 작은 농부도 이럴진데 큰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말할 나위 없이 바쁘고 분주하다. 수확한 농산물을 팔아야 하고, 저장도 해야 하고, 가공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농식품부, 농특위, 농경연, 균형발전위 등 범정부 측에서 내놓는 정책 대안들이나 논의 과정들을 보면 너무나 한가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왜일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정책대안들이지만 그 정책대안들은 결국 현장의 농민들에 의해 구체화돼야 할 과제들인데 농민들은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농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소득안정장치는 보험에 들라는 것 외에는 전혀 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예컨데 농특위가 최근 제시하는 농정과제들을 보면 2030년까지 앞으로 10년 내에 밀자급률을 10%, 식량자급률을 10% 포인트 높이고, 친환경농업을 30%까지 확대하겠다는 등 수많은 목표치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밀자급률은 1% 미만이고, 식량자급률은 23% 수준이며, 친환경농업은 2~3%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무리 목표치지만 겨우 10년 안에 그걸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단언컨데 불가능한 얘기다. 이러한 목표치들이 한둘이 아니다. 뭘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뿐만아니라 정책의 용어 선택도 이상하기 그지 없다. 그린 뉴딜이니, 디지털 뉴딜이니, 푸드플랜이니, 스마트팜혁신밸리, 농산어촌유토피아현장토론회니 하는 것들이다. 그린? 뉴딜? 푸드플랜? 스마트팜? 밸리? 유토피아? 정책과제명에 꼭 영어를 써야만 할까. 영어를 사용해야만 소위 있어 보이는가. 그중 압권은 유토피아다. 농산어촌이 유토피아라는 건지, 농산어촌을 유토피아로 만들자는 것인지, 그 정확한 저의는 모르겠으나, 작금의 농산어촌과 유토피아가 제대로 어울리는 용어라고 보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사전적 의미의 유토피아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토마스 모어)’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농산어촌과 유토피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융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농산어촌 사람들은 유토피아까지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냥 평범하게 살기 좋고 먹고 살만 해도 좋을 우리의 농산어촌 사람들이라 확신한다. 용어 하나 가지고 지나친 지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념을 이렇게 합성해 볼 수 있다는 시각 자체가 전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태다.

용어의 선택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교수 출신인 내가 보아도 뭔 얘기인지 이해가 잘 안 가는 구름잡는 내용들이 잡다하게 많이 들어 있다. 말만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장 농사라도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농촌지역 사람들에게는 한가한 얘기요 거대 담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있다. 다름 아니라 사회적 경제니 협동이니 협업이니 협약이니 하는 개념들을 너무 쉽게 남용한다는 점이다. 과연 현장의 농민들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도 문제려니와, 누가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 구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은 농촌현장의 지도자나 운동가나 농민이 해야 하는데 거창한 의제만 제시하면 다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농촌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는 사람이 없거나 부족하다. 수십년 간 지역인재를 키우지도 않았다. 인적 기반도 없고 소득 보장도 없는 정책대안의 무분별한 제안은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이제 농촌에 산 지 5년을 마무리하는 작은 농부가 우리의 농촌·농민·농업을 점점 더 희망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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