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존엄을 위한 식량

  • 입력 2020.11.01 18:00
  • 수정 2020.12.16 09:07
  • 기자명 송기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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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변호사
송기호 변호사

 

지난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0개 주요국(G20) 농업장관회의가 열렸다. 장관들은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역병과 기후 위기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장하고 위생적인 식수를 제공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확인했다. 이를 위해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복원력이 있는 농업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농업은 위기 상황에서 인간 존엄의 최후 보루다. 사람의 먹을 권리를 실현하는 모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담은 식량접근권은 누구나 그 안전성과 수량에서 사람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줄 정도의 먹거리를 누릴 권리다. G20 농업장관회의가 코로나19 위기에서 복원력 있는 농업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어떠한 농업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농업일까? 농민이 복원력 있는 농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농업경시 풍조의 배경에는 농지를 더 쉽게 농민의 품에서 떼어 내려는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도권에 그 많은 신도시를 수차례 발표할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아파트를 지을 자리에 농지가 있고 농사짓는 농민이 있다는 사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곳에 지을 아파트를 분양받으면 값이 얼마나 오를지 교통은 편하고 학군은 좋은지만 본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당연한 것, 아니 현명한 삶의 지혜로 받아 들이도록 하기 위해 농업을 무시하고 천시하는 것이다. 농지 위에 공장을 짓고, 아파트를 건설하고, 도로를 내려고 하는 관점이 세상을 지배하려면, 농지 위에서 이뤄지는 농업을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는 위기에 강하게 대처하는 농업이 나올 수 없다. 전국의 동네마다 사정과 처지가 다르겠지만, 농민의 농지 접근권을 혁신적으로 보장하는 개혁이 필요하다. 오랜 관행과 요구를 갑자기 바꿀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지치지 않고 일관된 방향을 잡고 제시해야 한다. 농지를 더 이상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농지를 농업생산이 아닌 돈벌이 공간으로 보는 탐욕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농지를 빌리는 값을 수확량의 10분의 1 이내로 하는 방안을 포함해서 경자유전의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생산자가 농지를 더 비옥하고 효율적이며 강한 생명력을 지닌 토대로 돌보고 가꿀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요소는 농산물 값 보장이다. 값이 널뛰기를 하고 농업이 하나의 도박처럼 된다면 위기에 대응하는 탄력성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농수산물의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이 있다. 이 법은 ‘적정한 가격’이라는 낱말을 써서 그 가격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보호하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떠한 가격이 ‘적정한 가격’인지에 대한 성찰과 내용은 법에 없다. 이제 그저 종이로 된 법전에 들어 있기만 한 단어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살아 있는 적정가격을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그 뜻을 정의해야 한다. 적정가격은 일차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식량을 보장할 수 있는 끈기 있는 농업을 유지할 수 있는 가격이어야 한다. 이는 반드시 보장해야 할 최저선이다. 동시에 적정가격은 꼭 필요한 유통 단계만을 거쳐서 소비자에게 제시되는 가격으로 유통단계에서의 착취나 독점 이윤이 없는 가격이어야 한다.

소비자들은 농산물 가격의 폭등도 폭락도 원하지 않는다. 안정적이면서 농업을 유지할 수 있는 가격이면 만족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농산물 가격의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것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생산자 조직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계획적 생산이 효과 있게 되려면 농산물 시장과 유통에서 가격 불안정 요인과 독점이윤이 제거돼 안정적인 가격이 형성돼야 한다. 현재 가락시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깜깜이 경매’는 농산물 공급이 늘어나면 폭락을, 줄어들면 폭등을 부채질하는 역기능이 크다. 의무경매제가 이제는 경매독점 법인들의 독점 이윤을 보장하는 폐단이 됐다. 전체 농산물의 20%를 받아 줄 만큼 가락시장 유통인의 역량이 크다. 이를 잘 활용하려면 의무경매제를 폐지하고 농민의 출하 선택권을 보장하는 가격 보장 거래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한살림 생협과 같이 농민에게 안정적 가격을 보장하는 대안적 유통에 대한 지원을 법제화해야 한다. 수입농산물에 대한 체계적 대책도 같이 가야 한다. 코로나19 위기일수록 인간 존엄을 위한 농업의 역할에 매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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