령통사는 개성시내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오관산 령통골에 자리 잡고 있다. 령통사는 우리나라 불교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널리 퍼뜨리고 그 시조로 명성이 높은 대각국사가 활동하던 절이다. 이름은 왕후이고 자는 의천이며 대각국사는 시호(사망 후 이름)이다.
대각국사는 1055년 9월 개성 만월대에서 고려 11대 문종왕(1047~1082)의 넷째아들로 출생해 1065년 10살 때 령통사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나라 불교교단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크게 퍼뜨리고 그 시조가 됐다.
대각국사는 생애의 전 기간 불교의 학설을 깊이 탐구하여 수많은 불교경전들을 집성하고 방대한 규모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당시 아시아불교계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령통사는 고려 초기에 건설돼 16세기까지 존재했다. 북녘의 민족문화유산보존정책에 의해 6만여㎡의 부지면적에 연건평 4,000여㎡에 달하는 25동의 건물로 이뤄진 령통사는 대한불교천태종 교단에서 2005년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과 함께 높은 건축미학적 수준에서 복원됐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기차를 타고가면 세 시간 정도 걸리지만 고속도로를 따라가면 승용차로 도중에 ‘은정휴게소’에서 한 번 쉬어가는 것으로 두어 시간이면 도착한다. 거리는 160여km이다.
개성은 한마디로 매력을 끄는 북녘의 지방도시이다. 명승을 자랑하는 자연, 근 500년의 력사를 새겨온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수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려인삼’의 원산지, 전쟁과 평화의 양극이 대치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곳, 이것이 개성에 대한 함축된 표현이다.
고려시기에는 성을 연다는 뜻으로 ‘개성’이라 불렀다. 그 이후에는 소나무와 바위가 많은 산이라 하여 ‘송악’이라 했고 수도라는 뜻에서 ‘개경’, ‘황도’, ‘개주’라고도 했다. 조선시기에는 ‘송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었다.
개성은 한반도의 중서부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의 배경을 이루며 북쪽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와 여성미를 자랑하는 듯 둥굴 바위들로 이뤄진 송악산이 있으며 그 높이는 489m이다. 그 앞으로는 여러 갈래의 능선과 계곡들이 뻗어있는데 유달리 시내 한복판으로 삐져나온 높지 않은 산을 자남산이라고 한다. 송악산이라고 하는 ‘아버지’ 앞에 재롱스럽게 서있는 ‘아들’ 같다하여 그렇게 불린다.
머지않아 남북 교류협력의 시대가 오면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개성의 령통사는 불자뿐 아니라 많은 남녘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첫 번째 관광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