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8월, 할 말이 없다

  • 입력 2020.08.16 18:00
  • 기자명 최외순(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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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외순(경남 거창)
최외순(경남 거창)

비로 시작한 8월은 기어이 엄청난 강수량으로 모든 곳을 파헤쳐 놓았다. 밭을 가로질러 작은 개울이 만들어지고 푹 꺼진 논두렁은 작은 폭포가 됐다. 뒷마당은 쏟아지는 물과 함께 떠밀려온 토사들이 마당 높이를 높여놔 버렸다. 계단식 논두렁은 약속이나 한듯 한군데씩 무너져 있고 뒷산으로 이어진 길은 토사로 엉키고 나무도 쓰러져 있다. 그나마 산사태가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저녁을 하다 대파가 없어 텃밭에서 한창 커가던 파의 흔적을 찾아보는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고 삽으로 겨우 하나를 찾아낸다. 심어놓은 토종고추의 흔적은 그나마 뻣뻣하게 서 있는 고춧대를 보며 위치를 짐작한다. 혼잣말로 “그래봤자 텃밭인데 뭐”하며 위로했다.

우리 집 앞 할머니 참깨밭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변했다. 7월부터 계속된 비에 까매지더니, 며칠 전 내린 폭우에 기울어지고 녹아내리고 내 밭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아까워서 속이 터진다. 할머니는 봄부터 괭이로 혼자서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우고 몇 날 몇 주를 꾸준히 일하셨다. 그렇게 나의 부러움을 사던 푸르고 무성했던 참깨밭은 이렇게 비로 인해 무너졌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피해도 피해이지만 농작물은 속으로 병이 온다. 사과농가는 폭우로 파여진 땅도 문제지만 계속된 비로 방제도 안 돼 병이 오고 올해 작황이 형편없을 상황에 또 한 번 절망한다. 농민들은 감당하기 버거운 시름으로 마음속에도 긴 장마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유난히 따뜻한 겨울, 냉해를 입고, 우박이 떨어지고, 긴 장마와 폭우, 그리고 무엇이 남았을까.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기후위기로 가중된 농업의 위기를 친환경적인 농업기반을 튼튼히 하는데서 해결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팜이라는 최첨단 방식이라 여기는 고비용 반생태적인 방식에서 찾는 정책들이다.

기후위기도 무수히 태워내고 소비하는 방식의 산업구조가 만들어낸 참사이고 코로나19 이후로 삶의 방식, 경제구조도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에 기반하는 사고가 바뀌지 않는다면 위기는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생명을 키워내는 농민들에게 가장 먼저 크게 올 현실이다. 자연의 엄중한 경고와 피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농민들의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먼 나라 툰베리라는 소녀의 연설을 빌어 권한과 역할을 쥔 이들에게 호소한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중략) 모든 미래세대의 눈이 여러분을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섭도록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혹시 산의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자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화난 모습으로 연설하는 툰베리라는 소녀가 계속 떠오르는 8월의 어느 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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