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착한 화폐

  • 입력 2020.08.09 18:00
  • 기자명 김현희(경북 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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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경북 봉화)
김현희(경북 봉화)

8월초 유례없이 봉화에 폭우가 내렸다. 보통 6월 장마는 있어도 7월말 8월초에 이렇게 지루한 장마가 오기는 드문 일이다. 해마다 날씨에 대한 예측은 빗나가고, 그때마다 크고 작은 피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곡식과 과일, 채소들이 지리한 장마 탓에 제대로 익지도 못하고 있는 터에 폭우까지 쏟아져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가뭄엔 먹을 게 있지만 긴 장마엔 먹을 것 없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실감이 난다. 이제 기후 위기라는 말이 일상적인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가지고 온 인재(人災),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걸 다들 알고 공감하지만 지금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방향을 전환할지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올해는 내가 활동하는 봉화군농민회 회원 부부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는 바람에 농민회 회원들이 만리산 사과 과수원 품앗이를 하게 됐다. 다행히 회원들 중 사과 재배 농민들이 많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년 태풍으로 인해 사과 과수원이 홀딱 날아가 기존 과수원을 엎고 새로 조성한 회원이 있었다.

올 봄에 새로 과수원을 조성하다보니 시간여유가 생겨 과수원에 피해가 생겼던 그 회원을 만리산 과수원 품앗이 대장으로 임명하고, 회원들이 돌아가며 자원해서 제초를 하고, 전지를 하고, 약을 치고, 과수원을 돌보게 됐다. 같은 사과를 재배해도 저마다 과수원을 관리하는 방식이 다르다보니 작년 영농일지를 들춰보며 최대한 만리산 과수원에 맞는 약 처방과 전지, 관리 방식으로 돌보기 위해 회의를 하고 순번을 정하고 일의 방식을 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만리산 과수원은 꼭 사과 봉지 씌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방제나 제초, 전지는 서너 사람이 돌아가면서 해도 되지만 봉지 씌우기는 해본 사람이 없고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고민이 많이 됐다.

하지만 같은 농사라도 자기만의 철학과 방식이 있다. 힘들지만 농장주가 마음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회의를 마쳤다. 덕분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들이 다함께 5만개의 사과 봉지 씌우기를 3일 만에 끝냈다.

만리산 과수원을 공동 품앗이로 돌보면서 그동안 고민해 오던 농민화폐를 시작했다. 1농, 4농, 8농 단위로 화폐를 만들고 1농은 한 시간 품값을 8,000원으로 책정했다. 물론 실물경제보다는 싼 가격이지만 품앗이 개념이 강하니 조금 낮게 정했다. 기술이나 숙련도에 따라 사실 1농의 값은 엄청난 차이가 나겠지만 함께 나누는 마음으로 똑같이 정했다. 함께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시간이 갈수록 회원들이 느끼는 연대의 끈은 든든해졌다.

다들 자기 농사짓기도 허덕이는 입장이라 함께 할 생각을 못했는데, 농민화폐가 적절하게 순환될 수 있도록 농가별로 급한 일이 있으면 요청하고, 함께 하니 농사일이 여유가 생기고 회원들끼리 통용되는 화폐가 순수한 노동의 교환으로 사용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농업이 기계화되고 자본화되면서 외적으로는 커다란 자본의 바퀴 속에서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자급자족을 꿈꾸고, 호미와 낫으로 밭을 돌보고, 망치와 톱으로 나무를 다듬고, 집을 돌보고 마당을 꾸미며 작은 들꽃 하나, 씨앗 하나에도 행복해하는 많은 소농들이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언제나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기후 위기와 농업·농촌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연과 함께 손잡고 나가기 위해서는 생명의 농사를 짓는 소농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백 번 천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나 싶다. 요즘 코로나19로 세상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서로에 대한 협력과 연대, 사회적 지지, 함께 살기를 통해 면역력을 키운다.

우리가 코로나19로 배운 게 있다면 ‘하나가 무너지면 다같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는 농업 위기이자 식량 위기이고 우리 밥상의 위기이다. 대규모 산업화 영농이 기아를 면하고 인구를 살린다고 믿지만. 농민이 없는 농업은 순환하지 않는 상품으로 하락할 뿐이다.

농민화폐의 앞면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농민화폐는 농민회원의 땀(노동)의 가치를 보증하고, 우정과 연대에 기여하며, 마음을 나누고 힘을 보태는 오래된 미풍을 이어가고자 봉화군농민회에서 발행한 ‘착한 화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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