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콩과 들깨를 심은 하우스로 순식간에 토사가 밀어닥쳤다. 들깨의 자취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고 하우스에 세워둔 40마력짜리 트랙터도 운전석 윗부분만 모습을 드러낸 채 토사에 완전히 파묻혔다. 야산과 이어진 대파밭은 물살에 휩쓸린 토사와 나뭇가지 등으로 쑥대밭이 됐다. 출하를 며칠 남기지 않은 대파였다.
지난 2일 충북 제천 지역에 약 300mm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시간당 30~60mm에 달하는 강한 비였다. 폭우는 결국 산사태를 불러왔다. 산곡동 산으실마을 뒷산과 중산간에 위치한 사과밭으로부터 토사와 자갈, 뿌리가 뽑힌 나무 등이 거센 물살과 함께 마을을 덮쳤다. 예기치 못한 재난에 인근 동사무소로 겨우 몸만 피했던 주민들은 3일 오전 하나둘 마을로 돌아왔다.
장중근(68)씨는 토사에 파묻혀 망신창이가 된 대파밭과 하우스를 보며 연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아내는 쑥대밭이 된 마을을 돌아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장씨는 “어제까지도 언제 수확을 할까 고민했던 밭이었다. 아내와 농사 잘 지었다며 서로 좋아했는데…”라며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우스 맞은편의 김봉남(80)씨 집 또한 토사에 파묻혔다. 차고에 있는 차량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집 문패만 겨우 보일 정도로 밀어닥친 토사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김씨는 “팔십 평생 이런 큰 물난리는 처음이다. 저 위 사과밭에 있던 대형 드럼통이 물살에 집까지 굴러왔다. 서둘러 오긴 했는데 복구할 길이 막막하다”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밭 일부가 물에 잠기고 토사에 쓸렸으나 다른 집에 비해 큰 화를 면한 권재선(83)씨는 배수로로 흘러내리는 물에 옥수수를 씻었다. 권씨는 “새벽부터 복구하느라 힘들 텐데 옥수수라도 삶아 주려고 한다. 큰 난리일수록 서로 도와야 않겠냐”면서도 “어젠 정말 비가 무섭게도 내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날이 밝으며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굴삭기를 비롯한 중장비를 동원해 마을을 덮친 흙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마을길을 정비하고 배수로에 쌓인 각종 폐기물을 치우는데 인력이 집중됐다. 먹구름을 잔뜩 드리웠던 하늘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다시 장대비를 쏟아냈지만 주민들은 복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공동농기계보관창고에 쌓인 토사를 밖으로 빼내던 한 주민은 “정말 이번 장맛비는 지긋지긋하다”면서도 손에 잡은 삽을 놓지 않았다. 폭우가 남긴 상처는 분명했지만 예전의 고즈넉한 풍경의 마을로 되돌리겠다는 주민들의 의지를 장대비는 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