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강제휴가

  • 입력 2020.07.26 18:00
  • 기자명 전용중(경기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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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중(경기 여주)
전용중(경기 여주)

이른봄에 심었던 쥬키니를 뽑은 자리에는 다시 가지를 심었습니다. 호박 따며 모내기 하던 전쟁 같은 5월에 비하면 7월은 조금 수월한 편입니다. 하지만 5월의 긴장에 맞춰진 몸뚱어리는 자꾸만 논두렁으로 밭두렁으로 향합니다. 무언가를 계속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냥 좀 쉬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놀고먹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러던 사이 시작된 장마는 강제휴가를 제공합니다.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에 모처럼 눈을 뜨고도 일어나지 않는 호사를 부려 봅니다. 자리에 누워서 오늘은 뭘 할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획이 서질 않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비 오는 날의 하루는 여지없이 술타령이 되고는 합니다. 우리 밭에만 비가 오는 것이 아니다보니 몸뚱이 근질거리는 동네 형님들과 오랜만에 부어라 마셔라가 됩니다.

우리 동네에는 초창기부터 농민회를 시작한 형님들이 몇 분 있다 보니 술자리의 화두는 농사 이야기로 시작해서 세상 이야기로 자연스레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아침부터 마신 술에 취해서 이야기는 사뭇 진지함의 늪으로 빠져 버립니다. 요즘 농지문제로 이런저런 회의를 다니며 답답함이 쌓였던지라 순전히 나로부터 시작된 논쟁이었습니다. 나하고는 띠동갑이 넘는 60대 중반의 형님들에게 ‘땅’과 ‘노동’을 가지고 술기운을 빌어 도발을 한 것입니다.

꼬부라진 소리로 형들에게 하던 나의 얘기는 대충 이랬습니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농사를 지을 건데 욕심이 커지기만 하느냐?”

“아이들 다 키워서 시집장가 보냈으면 그만 욕심 버리고 농민운동 열심히 해야 하지 않느냐?”

“농민해방 하자고 농민운동 시작하고선 자기 스스로 노동에서 해방도 못하느냐?”

“진짜 소원이 논두렁 베고 죽는 거냐?”

“불알 두 짝으로 시작해서 겨우 장만한 땅인데….”

형님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일 안하면 뭘 할 거냐?”

“농민회가 나오라면 언제 안 나간 적 있냐?”

“이러고 살다 마는 거지….”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 술도 취하고 비도 가늘어지고 왜 이러고 앉았었나 하는 식으로 각자의 집으로들 갑니다. 공연히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한 미안함에 속만 더 복잡해집니다. 농민들이 주 5일 근무에 하루 8시간 노동을 하고 살지는 못해도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꼭 비 오는 날이 아니더라도 쉬고 싶을 때 쉬면서 일정한 정년이 되면 경제적 압박과 욕심에 중독된 노동에서 해방된 농사꾼이 돼야 할 텐데….

다음번 비 오는 날엔 머리 아픈 얘기 말고 면 지회 공동경작지 논두렁 깎고 토종닭 잡아먹을 이야기나 하면서 강제휴가라도 기분 좋게 쉬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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