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감히 이웃 어르신과 싸우다

  • 입력 2020.07.19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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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봄 농사 일이 한밤중일 때였습니다. 이미 다른 집들은 2모작 모심기 준비도 끝나갈 무렵에 우리집은 마지막 마늘을 뺐습니다. 부지런히 마늘을 빼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찾는데, 아뿔싸 서두르다 물을 챙겨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늘빼기는 꽤 고된 노동이라 목마름을 참기는 어려운 법이지요.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다말고 물을 마시러 차로 이동을 해야 했습니다.

때마침 농로 모퉁이를 돌아가니 농로를 가로질러 호스를 깔고 경운기로 물을 푸고 있었습니다. 이럴 경우 호스 주변에 각목을 대서 차들이 지나다녀도 되도록 조치를 취하는데 그런 준비가 안 돼 있길래 의아하게 여기며 경적을 울렸습니다. 10m 쯤 떨어진 곳에 어르신이 한 분 계셔서 그분이 주인이지 않을까 여기며 지나가도 되겠냐는 의미의 경적을 울렸는데 이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경적을 울려도 움직임이 없어서 지나가도 되는 줄 알고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사뿐히 밟고 갔다가 돌아와서 마늘을 계속 뺐습니다. 

잠시 후, 잔뜩 화가 난 상태의 어르신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보소, 이 차 주인이요?”라고 다짜고짜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물을 푸는 데 그냥 지나가는 게 말이 되냐고, 경적소리를 듣고 달려갔는데 이미 밟고 지나갔다고, 여기는 농로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시는데 어이가 없었습니다.

물을 푸는 것 봤다고, 경적을 두 번이나 울렸는데 반응이 없어서 지나갔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꾸 화를 내시니 나도 덩달아서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렇게 화나시면 처음부터 각목을 대서 조치를 하시지 왜 안 하셨냐고, 아니면 그 곁에 바로 붙어 있다가 지켜 서서 통제를 하시던가 해야지 왜 남 탓을 하시냐며 댓거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젊은 여자가 대든다고 더 큰소리로 화를 내셨습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며 다투다가 더는 어쩔 수 없었던지 두고 보자며 어르신께서 되돌아가셨습니다.

얼떨결에 이웃 마을 어르신과 싸운 꼴이라니 꽤 복잡한 심경이 됐습니다. 어르신과 싸우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이미 잘못한 쪽은 젊은이가 되는 것이고, 그것도 젊은 여자가 겁 없이 대들었으니 행실 나쁘다고 소문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고, 똑똑한 척하더니 어른들과 싸움질이나 한다고 할 테니, 그냥 사과부터 해버릴 것을, 나는 왜 성질머리가 더러울꼬? 탓하기도 하며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아득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화를 낸 여성들은 자신의 분노가 정상감정일 수밖에 없다고 주변을 설득하고 확인받고자 합니다. 격한 감정에 싸일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여성의 폭발적인 감정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왔으니까요. 여성은 참고 인내하고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존재이지, 함부로 큰소리쳤다가는 사회적으로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자신의 감정이 정상적인 반응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젊은 여성의 무지와 고약함과 버릇없음을 탓하기에 딱 좋았으니 자신의 감정에 정당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는 않으셨겠지요. 이러기를 수천 년도 더 해온 탓에 여성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존중하기보다 검열하기가 더 바쁩니다.

여성의 우울증 발생빈도가 70%나 높은 이유도 이와 상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감정표현에도 차별이 있는 이 불평등이 어찌 하루아침에 객기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이럴 때는 참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더라도 그 어르신을 만나면 먼저 사과를 해야겠지요. 물리적 피해를 입은 쪽은 그 쪽이니까요. 그리고 또 말할 것입니다. 나도 화가 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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