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헌책방① 그 거리엔 책들이 축복처럼 널렸었다!

  • 입력 2020.07.1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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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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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의 어느 주말 오후, 서울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앞.

하천 복개도로와 그 위 공중으로 뻗어있는 고가도로로는 자동차들이 소음을 뿌리며 부단히 왕래한다. 복개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시장건물 1층으로는, 고만고만한 작은 책방들의 행렬이 아득하다. 남자 중학생이 서점으로 들어선다.

-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어 책 있어요? 아, 여기도 없다고요? (바로 옆 서점으로 가서) 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어 책을 잃어버려서 헌책 사려고 그러는데요…에이, 참, 큰일 났네, (다시 그 옆 서점으로 들어서며) 아저씨, 중학교 2학년 국어 책…

중학생의 뒤를 이어서 고3인 듯한 여학생이 똑같은 행로로 서점을 탐방한다.

-아저씨, ‘알기 쉬운 삼위일체'나 안현필의 ‘오력일체’ 있어요? 지난번에 구해놓겠다고 하셨잖아요. 어, 이 서점이 아닌가? 끝에서 열한 번째 서점이었는데? (옆 서점으로 가서) 아저씨, ‘삼위일체’나 ‘오력일체’ 없어요? 그럼 ‘메들리삼위일체’나 ‘정통종합영어’는요?

서점이라고는 하지만 공간이 매우 협소한 데다 출입문이 달려 있지 않아서 옆 서점으로, 또 그 옆 서점으로 옮겨가는 데에 두세 걸음이면 족하다. 앞에서 여학생이 입에 올린 무슨 ‘삼위일체’니 ‘오력일체’니 하는 것들은 70년대에 베스트셀러였던 영어참고서의 이름들이다.

그 두 사람 뒤로도 중고생과 대학생들의 순례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박종홍의 ‘철학개론’을 찾는데요. 있어요? 그럼 주세요, 얼마지요? 아, 그리고 다음 주에 올 테니까 유기천의 ‘형법총론’ 좀 구해놔 주세요.

-아저씨, 펄벅의 ‘대지’ 없어요? 독후감 써야 하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요? 있다고요? 아, 다행이다. 여기 있는 릴케 시집도 주세요.

-어? 며칠 전 이 자리에 ‘사상계’ 창간호 있는 거 보고 갔는데 어디 있어요? 예? 어제 다른 사람이 사갔다고요? 아이고, 한 발 늦었네.

그 시절 서울 청계천 6가 일대의 헌책방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일상적인 풍경이다. 평화시장 1층의 바깥쪽을 따라 120여 개의 서점들이 늘어서 있던 그 헌책방 거리를, 사람들은 ‘평화시장 헌책방’이라고 하거나, 혹은 ‘청계천 헌책방’이라고 불렀다. 아니면 그저 ‘청계천에 나간다’는 말이,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곳에 헌책을 사러 가는 행차로 통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곳은 책을 ‘사려는’ 사람들만이 찾는 곳은 아니었다. 이런 고객들도 있었다.

-아저씨, 오늘 오후에 저 위 서울운동장에서 고교야구 준결승전 하거든요. 입장료가 없어서 그러는데… 이 영한사전 얼마나 줄 수 있어요? 책은 깨끗해요. 보세요. 낙서 하나도 없지요?

-아저씨, 이 책 맡길 테니까 1,500원만 주세요. 같은 과 친구들하고 막걸리 마시다가 술값이 부족해서요. 대신 다른 사람한테 팔면 안 돼요. 내일 모레 꼭 찾으러 올게요.

그 곳은 필요 없어서 가져온 헌 책을 사들이는 곳이기도 했지만, 급한 사정이 있는 가난한 학생들이 교재를 맡기고 급전을 구해 가는 전당포 구실을 하기도 했다. 책을 사러 갔든 팔러 갔든, 육칠십 년대에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끝 간 데 없이 기다랗게 늘어선 그 헌책방 거리를 한두 번쯤 순례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새 참고서나 신간 소설책 한 권 구입할 형편이 못 되었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그 거리로 갔다.

그때 청계천에 가기만 하면 없는 책 빼놓고는 다아아아아아, 있었다. 축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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