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계모임⑥ 번호계의 번호 하나 사실래요?

  • 입력 2020.07.12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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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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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한 식리계(殖利契) 중에서, 낙찰계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계가 바로 ‘번호계’(일명 순번계)였다. 번호계는 얼핏 들으면 그 운영방식이 매우 간단한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상당히 복잡하다.

번호계는 처음부터 아예 순번이 정해져 있었다. 애당초 계주가 번호를 정해놓고 사람들에게 순번을 부여하거나, 혹은 첫 모임에서 제비를 뽑아서 순번을 정하기도 한다. 물론 사정이 급한 사람일수록 앞 순번을 받으려고 하는데, 먼저 탄 사람은 매월 내야 할 곗돈에다 이자를 많이 얹어서 내야 한다.

반면에 뒤쪽 순서로 갈수록 원금보다 더 많은 액수의 곗돈을 타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앞 번호 못지않게 후순위가 인기가 있고, 대신 중간번호가 찬밥 대접을 받는다는 점이 낙찰계와는 다르다.

박영임 할머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500만원짜리 계에 20명이 가입했다고 쳐봐요. 그럼 달마다 25만원씩 내서 20개월 되면 모든 계원이 500만원씩 다 타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뒤에 탄 사람만 손해지요. 그래서 예를 들어 먼저 500만원 곗돈을 탄 사람은 매월 25만원씩만 불입하는 게 아니라 가령 5만원을 더 얹어서 30만원씩을 내요. 20개월 동안 내내. 이 사람이 불입한 돈의 총액은 600만원이니까, 먼저 탄 대신에 100만원을 더 낸 거지요. 그래도 손해 보진 않아요. 일찍 탄 곗돈으로 딴 데 가서 이자놀이를 해서 불리거든요, 그 다음 번호인 사람은 24만원씩 내고, 그 다음 번호는 23만원…이렇게 하다가 중간번호인 10번이나 11번은 그냥 25만원만 내게 되고, 그 다음부터 20번까지는 앞 번호 사람들이 더 불입해서 모아진 이자를 보태서 550만원도 타고 600만원도 타고…맨 마지막 20번은 가장 많은 돈을 가져가지요.”

물론 번호계도 여느 계처럼 1번은 예외 없이 계주 몫이고, 계주는 첫 달부터 끝 달까지 25만원씩만 낸다. 따라서 계주의 다음 차례인 2번부터 기본 액수에 얼마씩을 더하여 낸다. 순번에 따라 매월 불입해야 하는 액수나, 뒤에 타는 사람들이 받는 이자의 비율 같은 것은 애당초 계를 시작할 때 규약으로 정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번호가 20번이나 30번까지 있다고 해서 전체 계원이 20명 혹은 30명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사람이 두셋, 혹은 서너 개의 번호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가령 2번 12번 19번 하는 식으로 앞 번호와 중간 번호 그리고 뒤쪽 번호를 섞어서 할당받는다. 그 번호는 사고 팔 수도 있다.

-철이 엄마, 내가 500만원짜리 번호계를 들었는데, 내 번호 하나 안 살래? 25번까지 있는 곈데 내가 갖고 있는 번호가 2번하고 13번하고 22번이야.

-2번을 주면 내가 사지.

-2번은 내가 벌써 타먹었어. 13번 가져가.

-에이, 차라리 22번이면 돈이나 많이 타지만 천덕꾸러기 중간 번호는 싫어.

번호 세 개를 부여받은 사람이 자기 몫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를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하고, 그 세 몫을 혼자 감당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계 전체를 책임 맡는 계주가 있고, 자기 번호를 제삼자에게 분양한 ‘새끼 계주’들이 또 존재했던 셈이다.

이 번호계의 경우 계주가 운영을 잘 못하여(혹은 곗돈을 횡령하여) 발생하는 ‘파계(破契) 사고’가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허리 졸라매고 곗돈을 불입하여 셋방을 넓혀가고 자녀들의 학비를 감당했다. 이런저런 사고들이야 밥에 섞인 뉘처럼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인 흠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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