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심비우스’와 농업 생태계

  • 입력 2020.06.28 16:38
  • 기자명 유병덕 이시도르 지속가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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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덕 이시도르지속가능연구소 소장
유병덕 이시도르지속가능연구소 소장

전염병에 대한 방역은 건강의 문제가 아니다. 마스크를 쓰면 쓰지 않을 때보다 더 안전하다. 손을 자주 씻으면 씻지 않을 때보다 더 안전하다. 그래서 방역에 총력을 쏟는다. 사실 손을 자주 씻는 등 위생적으로 생활하면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감기나 식중독에도 훨씬 덜 걸린다. 방역은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다. 방역은 이제 상식이다.

하지만, 방역이 우리를 더 건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안전과 건강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건강은 방역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단순히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건강을 뜻하지 않는다고 명시하면서, 건강은 신체, 정신, 관계가 무탈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신체, 정신, 관계의 균형이 깨지면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팬데믹(Pandemic)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방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류는 일단 안전하게 위기를 넘겨야 한다. 하지만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안전을 목표로 하면 안 된다. 안전은 인류의 지속 조건이지만 지향이 될 수는 없다. 안전으로 만족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격하된다. 인간은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건강과 행복을 추구할 때 비로소 존엄하다.

GMO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조작한 작물이 안전하다고 하지만 건강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GMO를 두고 안전성에 논쟁을 벌이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GMO 논쟁은 건강에 관한 문제로 전환해야 한다.

질병근원론(Pathogenesis)과 건강근원론(Salutogenesis)

현대의학은 질병근원론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질병근원론이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을 의료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질병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방역과 치료에 역량을 집중하는 지금의 대처방법이 그것이다.

반면 건강근원론은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의료의 목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유태인 의료사회학자 아론 안토노브스키가 홀로코스트로부터 생존한 동족 유태인들 중에서 트라우마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발견한 건강의 원리이다. 생존자들 중에는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픔의 원인을 치료하려는 사람들보다 회복이 빨랐다. 질병의 원인에 관심을 두기보다 건강의 원인에 관심을 두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원리이다.

물론 질병근원론에서도 면역의 강화를 중요시하고, 건강근원론에서도 질병의 치료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질병과 건강 중에 무엇이 근원적인가에 대한 태도는 철학적인 문제이며 인간의 문화와 경제체제까지 규정할 수 있는 사상의 문제이다.

세상에서 건강근원론이 우세했다면, 사람들의 신체, 정신,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과도한 개발, 부의 축적, 생태계 약탈이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류가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 그치지 않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쩌면 코로나19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과거 중국의 의사들은 질병을 치료하는 만큼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강해지는 만큼 돈을 벌도록 했다고 한다. 의사들의 역할을 질병을 치료하는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로 봤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친환경농산물 인증제도가 잔류농약 등 오염물질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나, 식품산업에서 해썹(HACCP) 등 식품안전의 위해요소를 관리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질병근원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먹거리를 ‘안전하게’ 관리한다는 것은 언뜻 듣기에 먹거리 관리에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먹거리 산업화를 위한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먹거리는 안전하기보다 건강해야 한다.

질병근원론과 건강근원론은 단지 의학의 접근방법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경제와 문화의 맥락에서도 보편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이고, 농업과 먹거리 정책의 방향을 세우기 위해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할 문제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부작용을 그대로 둔 채 코로나19 이전의 경제체제로 되돌아간다면 전염병은 다시 우리 사회를 공격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농민들이 ‘호모 심비우스’이기를 희망한다. 지난 5월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다랑이논에서 한 농민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부작용을 그대로 둔 채 코로나19 이전의 경제체제로 되돌아간다면 전염병은 다시 우리 사회를 공격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엔 농민들이 ‘호모 심비우스’이기를 희망한다. 지난 5월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다랑이논에서 한 농민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격

인수공통감염병의 위험은 점점 커져, 이윽고 코로나19라는 진화된 바이러스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 초반에 인류가 극복한 코로나바이러스(사스, SARS)는 가공할 전염력과 치사율을 지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가 되어 돌아왔다. 사스는 증상이 나타난 후에 전파력을 갖기 때문에 증상자만 격리하면 전염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도 전파력을 갖도록 진화했다. 환자에게 의료 조치를 취하기 전에 이미 전파는 이뤄져 감염자가 삽시간에 폭증하는 것이다. 그렇다, 바이러스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의 전략을 개발하는 종의 집단지성을 갖추고 있다.

질병의 공포로 호모사피엔스의 생활이 바뀌었고, 현세인류가 숭배해 왔던 신자유주의 경제가 멈췄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이웃과 동료를 만나지 못하게 돼 비극이다. 학교를 가지 못하고, 교회를 가지 못하고, 병원을 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상점과 회사에도 발길이 끊기니 거래가 성립되지 않고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진다.

‘지혜로운’ 인간, 호모사피엔스는 언젠가 코로나19를 극복할 것이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전염병을 극복한 후에 과거의 풍요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인류가 가야 할 길일까? 코로나19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주도해온 생태계 약탈에 대한 반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야 할 미지의 생태계까지 탐욕이 미치자 박쥐 등 포유류에 자연스럽고 지속가능하게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반격한 것이다.

원래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기주에 기생하므로 기주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기주가 살아 있어야 자기도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화와 도시화로 바이러스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쉽게 다른 기주를 점령할 수 있어 기주가 죽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인간의 경제체제를 바이러스가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이러스를 극복해도 다시 과거의 경제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번 사태를 극복해도 생태계를 뒤흔드는 탐욕과 약탈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지 않으면 인수공통감염병은 더 자주, 더 세게 인류를 위협할 것이다. 과학과 의료기술이 발달해도 자연의 반격에는 속수무책이다. 이제는 질병 억제의 경제체제가 아니라 건강 추구의 경제체제로 전환할 때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인간형, 호모 심비우스

코로나19를 겪으며 얻은 교훈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경제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인류는 번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대로 살다가는 필경 몰락을 맞이할 것을 인류는 직감하게 됐으리라. 생물 진화의 원동력은 경쟁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아니라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공생의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이다. 그래야만 자신을 포함한 여러 종들이 생명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선생은 생물의 진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구의 생물들은 오랜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서로 간의 유사성을 줄여 서로 다른 니치를 차지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변화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이 엄청난 생물다양성이다(최재천. 2011.「호모 심비우스」이음).

건강한 생태계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 말씀이다. 유구한 세월 생태계가 진화를 거듭하며 지속돼 온 힘은 다른 개체 및 다른 종에 대한 경쟁력이 아니라 공생의 힘이다. 종의 건강은 다양성에 기반한다. 수천 년 농업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수만 개의 감자 품종에는 가뭄에 강한 것, 해충에 강한 것, 저온에 강한 것, 고온에 강한 것 등 다양한 형질이 공존했다.

다양한 형질들의 집합으로서 감자는 가뭄, 해충, 질병, 기후변화에 적응과 도태를 반복해 지금까지 살아남아 왔는데, 이제는 상업성 있는 한두 품종만 남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이 상실됐다. 인간은 잃어버린 생물자원의 능력을 과학기술로 보충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데, 그 기술이란 고작해야 살충제를 뿌리거나 GMO를 개발하는 일이다. 그조차 부족하면 외국에서 수입해서 먹으면 된다고 여긴다.

우리 몸의 건강은 생태계의 건강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필요 이상으로 개발하여 풍요롭게 소비하는 왜곡된 건강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젊어 보이는 외모를 건강의 기준으로 삼으며, 미용과 건강기능식품에 돈을 쓰고 있다. 왜곡된 건강 관념을 소비로 채우기 위해 농산물까지도 획일화, 규격화했다. 그 결과 농업 생태계는 병해충에 취약해 졌고, 질병근원론에 기반한 병해충 방제기술에 의존하는 농사를 짓는다. 합성농약과 화학비료에 적응하도록 개발된 한두 품종이 균일분포를 이루는 농업 생태계에 기대어 사는 인류는 건강한가?

농업 생태계는 다양한 생물들이 경쟁의 전장이 아닌 협력의 그물망을 이뤘을 때 건강해진다. 자연 생태계가 이루는 건강한 균형을 농업 생태계에 구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농민종자, 윤작, 혼작, 경축혼합, 토양유기물, 천적서식처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 농업 생태계가 건강한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면 농업과 먹거리 체계는 더욱 지속가능해 질 수 있다.

다시 학교를 가고, 교회를 가고, 병원을 가고, 거래처와 고객을 만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의 생활과 인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그저 위기를 극복한 기쁨으로 물질의 풍요를 다시 누릴 수 있다고 기뻐해야 할까? 건강한 농업 생태계를 이루기 위해 소비의 욕구를 절제하지 않고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전염병의 위협은 심화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성찰의 기회를 줬다. 바쁘게 살다보니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갑자기 멈춰보니 인류가 걷고 있는 길이 불행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됐다. 생태계 약탈, 환경오염, 무한경쟁, 과잉생산, 분배의 불균형, 계급갈등과 계층갈등 등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부작용을 그대로 둔 채 코로나19 이전의 경제체제로 되돌아간다면, 전염병은 다시 우리 사회를 공격할 것이다. 전염병뿐이겠는가? 미세먼지, 가뭄, 홍수, 화재, 지진 등 자연의 반격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바꾸자. 부작용을 치유함으로써 생태계와 공생, 지속가능, 협동과 조화, 적정생산, 분배의 균형, 계층 간 공생 등 긍정의 형질로 이루어진 경제체제를 세우자. 신자유주의를 무덤에 묻고 새로운 희망의 경제체제를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농업인이 최재천 선생이 말하는 ‘호모 심비우스’이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이 지구에 더 오래 살아남고 싶다면 나는 이제 우리가 호모 심비우스로 겸허하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모 심비우스는 동료 인간들은 물론 다른 생물 종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호모 심비우스의 개념은 환경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이기도 하다. 호모 심비우스는 다른 생물들과 공존하기를 열망하는 한편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최재천. 2011.「호모 심비우스」이음).

우리 농정에 대한 속시원한 돌직구, ‘농사직썰’을 매월 1회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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