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계모임④ 그릇계‧이불계‧반지계

  • 입력 2020.06.28 16:3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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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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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임, 하면 우리는 먼저 가정주부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주부들이 계를 꾸리기 시작한 내력은 별반 길지가 않다. 그렇게 된 배경을,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1931년생 안영임 할머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계를 묻으려면 여자들이 일단 모여서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고 의논을 해야 할 것 아녜요. 그런데 양갓집에서는 젊은 여자는 밖으로 내보내질 않아요. 특히 강원도에서는, 여자는 들에도 나가지 않았어요. 밭 매는 것도 다 남자들이 했지.”

이 할머니의 얘기대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서 무슨 모임을 만들어 활동을 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고, 가정 경제의 주도권 역시 가장인 남자들에게 예속돼 있었다. 따라서 주부들의 계모임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때는 아무래도 1960년대부터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초창기의 계는 아주 작고도 소박한 것이었다.

-이놈의 양은냄비 밑구녁이 시꺼멓게 그을려 가지고 아무리 문질러도 닦여야 말이지.

-며칠 전에 스뎅인가 뭐 그런 거 파는 그릇장수가 우리 동네에도 왔던데….

-스뎅 그릇이 녹도 안 슬고 좋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어지간히 비싸야 말이죠.

-아, 참, 새댁, 이참에 우리 셋방 사는 사람들끼리 그릇계 하나 만들어볼까? 반찬값 아낀 돈을 매달 조금씩 거출해가지고, 돌아가면서 집집마다 그릇 한 벌씩 장만하자는 얘기지. 한 달에 한 번씩 곗날을 정해서, 시내 나가서 짜장면도 한 그릇씩 사먹고 말이야.

이렇게 해서 생긴 계가 ‘그릇계’다. 그런데 사실 앞의 대화에 등장하는 ‘스뎅’은 스테인(stain)을 그렇게 발음한 것인데, 얼룩이 지지 않는 그릇을 뜻하기는커녕 ‘얼룩’ 그 자체다. ‘녹이 안 스는 강철 합금’을 표현하려면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 혹은 최소한 ‘스테인리스’ 정도는 발음을 해 줘야 하겠으나, 까짓것 바쁜 세상이니 ‘스뎅’이라 해버린 것이다.

그릇 뿐만 아니라, 이불도 새 것 한 채를 구비하자면 부담이 작지 않았기 때문에, 알뜰한 주부들은 또 ‘이불계’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시절 어려운 가운데서 계를 만들어 그릇이나 이불을 장만한 할머니들 가운데는, 형편이 좋아진 후에도 새 그릇이나 이불을 찬장이나 장롱에 고이 간직해둔 채,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버린 경우도 많다.

형편이 조금쯤 나아지자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싶었다. 하지만 금반지는 서민이 넘보기 힘든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반지계’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금은방 주인들이 장삿속으로 권유해서 계가 만들어졌다. 한 주부가 금은방을 찾아왔다.

-결혼반지를 팔다니요, 어지간하면 두고 끼시지.

-오죽하면 결혼반지를 팔겠다고 가지고 나왔겠어요.

-아, 참, 아주머님, 내가 반지 하나를 공짜로 드릴 수도 있는데….

-반지를 공짜로 줄 수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주머니가 계원 열 명만 모아서 반지계를 하나 만드세요. 그러면 아주머니한테는 한 냥짜리 금반지를 공짜로 드릴게. 아주머님이 계주가 되셔가지고 계원 열 명을 모아 오시면, 금반지 열 개를 미리 만들어서 나눠 드리고….

계주는 계원 열 사람의 반지 값을 매달 분할 징수해서 금은방에 납부해 주는 대가로, 금반지 하나를 무상으로 받게 된다는 얘기다. 결국 금은방에서 계주의 신용을 믿고 반지 열 개를 할부판매 한 셈이다. 물론 계원들이 제대로 곗돈을 불입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계주가 감당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은 감수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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