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계모임③ 위친계, 부모님을 위하여

  • 입력 2020.06.2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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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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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이름의 계(契)들 중에서 그 내력이 매우 유구할 뿐만 아니라 시골의 전통마을에서 늦게까지 명맥을 이어왔던 계를 들자면, 단연 위친계일 것이다. 위친계(爲親契)는 글자 그대로 부모님을 위한 계였다.

봄철, 무논에서 써레질을 하고 있는 용식이에게 마을 동무가 급히 달려와서 급보를 전한다.

-길수네 조부님이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는데 아직 소식 못 들었나?

-아, 그래? 길수가 우리 위친계 계원인데…아이고, 지금 써레질이 문제가 아니지.

-어서 가보라구. 자네가 우리 위친계 유사가 아닌가.

용식이가 서둘러 써레를 딴 사람에게 넘기고는, 흙투성이의 발을 대충 헹구고 나서 급히 마을로 향한다. 용식이는 여남은 명의 마을 청년으로 조직된 위친계의 유사다. 유사(有司)는 계모임의 업무를 책임 맡은 사람이다.

-자넨 붓글씨 잘 쓰는 어르신들한테 가서 부고장 좀 써달라고 부탁하게.

-5일장인지 7일장인지 그걸 정해야 부고장에 발인 날짜를 적을 텐데?

-그건 상주한테 물어보라구, 그리고 자넨 목수 불러다가 관 짜는 일을 좀 서둘러야겠어.

-윗마을 아랫마을에 부고장 돌릴 사람들의 명부도 작성해야 할 텐데….

-아, 참, 수의 지을 삼베는 준비가 됐나?

상갓집에 모여든 위친계 계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5일장 혹은 7일장으로 치러졌던 장례는 유족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형제나 일가친척이 없는 경우이거나, 살림살이가 심히 빈한한 경우라면 더욱 그러했다. 거기 대비해서 가입한 계가 바로 위친계였다. 인천의 한 경로당에서 출신 지역이 각각인 노인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했는데, 어느 지역이나 위친계의 운영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위친계는 대개 집안의 장남들끼리 들게 되는데 가정마다 사정이 각각이에요. 부모와 조부모가 다 생존해 있는 경우, 부모만 생존해 있는 경우, 그리고 양친 중 한 쪽만 있는 경우 등 사정이 다양했기 때문에, 평소에 부담하는 곗돈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지요.”

“부고장이 작성되면 어느 마을엔 누가 가고 어느 마을엔 누가 가고 하는 식으로 역할분담을 한 다음에, 부고장 한 묶음씩을 갖고 뛰어다니면서 배달부 노릇을 하는 거지요.” “계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분담하지 않으면 가난한 집은 장례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요. 수의 지을 삼베 끊어와야지, 목수 데려다 관 짜야지, 장례기간 동안 문상객들 음식 차려대야지…. 그걸 다 위친계에서 부담했다니까요.”

고인의 상여가 나갈 때 운구를 하는 ‘상여꾼’ 역할도, 그리고 장지에 가서 땅을 파서 매장을 하고, 봉분을 만들어 잔디를 입히는 일까지 모두 계원들의 몫이었다.

다른 계들과는 달리 위친계는 도중에 와해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충청도 천안 출신의 할아버지가 들려준 다음의 사례는 특별한 경우이고.

“우리 조모님이 하필이면 6.25 전쟁 통에 돌아가신 거라. 난리 통에 다들 피란을 가버렸으니 누굴 원망하겠어요. 돌아가신 당일에 대충 뒷산에다 모셨지요. 그 바람에 계도 깨져버렸고.”

일제 강점기인 1938년의 조사에 따르면 계의 종류만도 480가지나 됐고, 평균 계원은 30여 명이었다. 그 많은 종류의 계들이, 개개인을 공동체로 한 데 묶는 매개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그런 고전적인 의미의 계가 아닌, 목돈 마련을 위해 서민들 대부분이 한 번쯤 가담한 적이 있는 바로 그 계모임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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