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촌의 지속가능성 목 조르는 제도들

  • 입력 2020.06.14 18:00
  • 기자명 김후주(충남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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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주(충남 아산)
김후주(충남 아산)

독일에 수백년 넘게 대를 이어 내려오는 사과농장 안에 그만큼 오래된 사과가공장이 있다. 주스, 술, 잼 등 다양한 가공품을 직접 판매한다. 이곳에는 그 지역과 농장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 선조가 사용하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양질의 수제 가공품을 생산한다. 농장의 생산물들은 그 지역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소비자들 역시 대를 이어온 단골이며 농장의 사과와 가공품들은 그 가정이 지닌 고유한 식생활역사의 일부다.

가공장에 가보면 처음 지은 그때 그 모습처럼 목가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간판, 목조건물, 오래된 문과 솥, 화로, 압착기들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빛나고 있고 정말 작동하기도 한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사과가 자라는 과정, 사과가 주스가 돼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직접 보고 배운다.

이렇듯 역사와 장인정신을 살린 가족단위 소규모 농가나 가공장이 그 지역, 그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포도주, 네덜란드의 치즈, 중국의 다원, 일본 곳곳의 오래된 특산물 가공장들. 농부들은 자기가 생산한 원물로 정성스럽게 먹거리를 만들어낸다는 자긍심을 갖고, 지역사회와 이웃들은 그 농장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에도 역시 전통을 지켜나가는 농가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 이런 소규모 농가가공장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태에 빠져있다. 나라에서 지원해준다며 선전했던 사업들이 오히려 독이 돼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졸지에 폐업을 하고 있다.

농촌의 소규모 가족농들을 좌절하게 하는 정책은 많다. 대표적인 예로 해썹(HACCP) 의무화가 있다. HACCP이란 미국에서 개발된 식품관리체계로 위해요소를 관리해 식품안전을 확보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철저히 대규모 기업형 식품공장을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 수많은 전담인력과 세세한 분업, 초고도화된 고가의 거대 설비, 건축물, 환경통제가 뒷받침돼야만 적용가능하다.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HACCP은 의무가 아니며 특히 농가에서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가족규모 가공장은 기업형 가공장과 차별화해 그 환경에 맞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한국은 소규모 업체에게도 HACCP 의무화를 도입했고 결과는 최악이다. 요즘 가업을 이어가던 청년농부들이 공무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깔보는 말투의 “가공장 파세요. 체험이나 하시던가”다. 수억원짜리 스테인리스 자동화 시스템이 아니라고, 농장에서 벌레가 많이 생긴다고, 지하수를 사용한다고, 온도계와 저울이 오래된 것이라서, 무쇠솥과 나무틀을 사용해서, 사무실과 서류작업을 담당할 직원이 없으니 아무리 생산품이 깨끗하고 문제가 없음에도 불법이라고, 문을 닫으라고, 오랜 세월에 걸쳐 투자해 자리잡아온 공장을 처분하고 농사나 지으라고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협박한다.

HACCP 의무화로 득을 보는 것은 오로지 컨설팅업체와 설비·건축업자 뿐이다. 이렇게 투자를 해놓고도 폐업을 피하기 어려운데 그렇게 난 손해는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고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된다. HACCP 뿐만 아니라 각종 사업엔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고, 자본이 없으면 불법으로 취급받는다. 청년농부들은 이런 리스크들 때문에 가업을 포기하며, 새로운 문화생산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6차산업을 장려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들이대는 이런 환경에서 농촌의 풍부화와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제도에 맞춰 현장을 구겨넣고 목 조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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