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행복해지는 돈쓰는 방법

  • 입력 2020.05.24 18:00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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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농민수당 60만원, 여성농민 행복바우처카드 20만원, 코로나19 정부재난기금 선불카드 100만원, 전남형 재난기금은 아직 안 나왔지만 5월말 경에는 나올 거고 지난 어버이날엔 딸들에게서 30만원을 받았으니 기분만 부자가 아니라 사실상 부자가 된 게 틀림없다. 딸이 내 손에 쥐어준 봉투 겉면엔 ‘남한테 쓰기 금지’, ‘여가생활 즐기삼’ 이라는 글귀가 예쁘게 적혀있다.

어딘가 아프다 싶어도, 뭔가 문제다 싶어도 왠지 나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인색하다 못해 묘한 죄책감이 드는 데다 내 모습과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살아왔다. 아마 이런 내 모습을 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 마음을 봉투에 담지 않았을까?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있고 일을 할 때는 아이를 위해 일을 한다는 여성들, 그 정점의 엄마. 함께 일을 해도 집안일은 여전히 딸의 몫으로 보이고 시댁의 권력구조에서 가장 약한 위치의 며느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딸을 보며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이중성을 가진 엄마 그리고 나 그 소용돌이 속에 들어있는 남편. 20대 청춘 딸 셋을 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는 가족의 모습이다.

거금을 들여 소고기를 사와 굽는다. 오늘은 농민수당으로 지역상품권을 썼다. 행복하게 돈을 쓰는 날이다. 야들야들 안 씹어도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맛이라며 틀니의 울 엄마는 모처럼 웃으신다. 가장 환상의 맛은 치킨이야 하던 딸들도 역시 고기는 소고기야 하며 웃는다. ‘나물 팔아 소고기 사먹을 날도 오겠지’ 하며 서로 마주보며 깔깔대는 밤이다.

바우처카드도 재난선불카드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식의 돈쓰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일만 하느라 돌아보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내 모습도 마음도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귀 기울이고 관심 갖는 여유를 부려 봐야겠다. 우습게도 돈을 손에 쥐니 이런 여유가 내 몸 안에 생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여 씁쓸하기도 하지만 펼쳐놓고 보니 좋기는 하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일을 많이 한다는 대한민국, 가장 바쁘다는 대한민국의 사람들 그 속에 여성농민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들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받는 주체도 못되고 보조자로 남겨져 있다. 농민수당이 농가수당이고 국민 재난기금은 가족의 대표 세대주에게 통으로 지급되고 있다.

나는 어쩌다 우리집의 세대주가 되어 이 영광을 누리고 돈을 쓰는 주체가 돼 있다. 아주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일상에서도 여성들이 주인으로 주체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세상살이는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선불카드로 들어온 돈 각자의 몫을 현금으로 나눠 줘야겠다. 파마를 하던 화장을 하던 옷을 사고 여행을 하던 스스로 알아서 하게 특히 엄마와 나는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손잡고 미용실을 다녀와야겠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하는 거다.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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