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밤섬 배 목수⑦ ‘마즈막 석양빛을 기폭(旗幅)에 걸고…’

  • 입력 2020.05.2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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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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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목수 이봉수는 스물네 살 때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독립됐다고 해서 배 짓는 목수의 길로 출발한 그의 진로가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이봉수가 만들었던 선박 중에는 ‘넓적배’라는 것도 있었다. 해방되던 해에 강원도 정선에서 그 일을 했다. 강 이 편과 저 편에 밧줄을 연결해놓고, 그 줄을 잡아당겨서 배에 탄 사람들이나 자동차를 건네주는, 배라기보다는 ‘움직이는 다리’ 같은 것이었다. 그는 정선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전나무를 베어서 그 넓적배를 만들었는데 가장 힘든 일은 벌목이었지요. ‘잉걸꾼’이라고도 불리는 벌목 인부들은 대부분 아편쟁이들이었어요. 아예 아침에 아편주사 한 대씩을 맞고 나서 산판으로 나서더라니까요. 그거 맞으면 천당에 간다기에 나도 한 대 맞아봤는데 아이고, 나한텐 안 맞더라고요. 한바탕 토하고 말았어요.”

전기톱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서 있는 나무의 밑동을 베는 작업이야말로 톱질 중에서도 가장 힘든 노역이었다. 짓누르는 나무의 무게를 톱날에 얹고 밀고 당기고를 하자면, 아무리 톱날에 기름칠을 한다 해도 어지간한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편에 의지했던 것이다.

전쟁이 터졌다. 밤섬에서 지척거리에 있던 한강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파죽지세로 내려온 인민군을 피해서, 밤섬 주민들도 피란 보따리를 쌌다. 이봉수는 멀리 경남 통영까지 내려갔었다는데, 전란 중에 잠시 돌아와 둘러본 밤섬은 옛 모습이 아니었다. 이봉수가 목수 일을 익혔던 율도조선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밤섬을 비롯한 마포나루 주변이 활기를 잃은 것은 해방 후 국토가 분단되고 나서부터였다. 연평 앞바다를 비롯한 서해바다의 조기잡이 어장이 38선 이북으로 편입돼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쇠락일로에 있던 마포나루와 밤섬의 영화는, 6.25의 포성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황포돛배를 만들던 율도조선소의 망치 소리도, 그리고 조깃배나 새우젓배가 부산스레 드나들던 마포나루의 풍경들도 그렇게 사라져갔다.

마포나루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밤섬의 80여 호 주민들은 60년대 말까지는 예전의 그 동네를 지키며 살았다. 그러다 1968년부터 여의도가 본격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영등포 쪽에 붙어있던 땅이 떨어져 나가, 밤섬은 모름지기 섬이 되었다. 주민들은 정든 밤섬을 떠나, 봉천동으로 신림동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주해야 했다. 주민들이 떠난 밤섬은 본격적인 해체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강 준설공사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밤섬은 대부분의 땅이 잘려나가고, 상징적인 형체만이 남아 오늘에 이른다.

1998년 10월 14일, 서울시에서 ‘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특별히 복원‧제작한 한선이 황포 돛을 달고 한강에 떴다. 팔순을 목전에 둔 배 목수 이봉수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었다.

“서울시의 제안을 받고서 예전 율도조선소의 늙은 목수 몇 사람을 수소문해서 같이 만들었지요. 그 한선이 돛을 올리고 한강에 뜨던 날, 술도 먹고 춤도 추고 했는데도…왠지 서글퍼지더라고요. 속으로 이미자의 ‘황포돛대’라는 노래를 중얼거렸어요. ‘마아즈으막 석양 비잋을 기이포옥에 거얼고…’ 그 노래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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