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농협엔 은행만 있는 게 아니라구요?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 #16

  • 입력 2020.03.01 18:00
  • 수정 2020.03.04 09:14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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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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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용사업’, 즉 금융 관련 서비스를 주로 취급하는 도시형 농협과 다르게, 농촌형 농협에서는 농민 조합원들을 돕는 ‘경제사업’을 합니다. 경제사업장은 영농철이 시작되면 각종 농자재와 농기구를 공급하느라 바빠집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바야흐로 새싹의 계절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농산물은 종자로부터 나오니, 농사를 지으려면 씨앗부터 구해야겠죠. 하지만 씨앗만으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부가적인 농자재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농민들이 이것들을 구하러 으레 가는 곳이 바로 농협인데요. 도시에 사는 우리가 잘 몰랐던 농촌 농협의 기능을 배우는 한편 영농철을 맞은 농민들의 이야기도 들어봅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관지미를 만나러 내려간 어느 날, 사당리와 미잠리를 가르는 도로를 달리며 마을로 향하는데 저 멀리 마을에서 1톤 트럭 한 대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 보입니다. 시력이 좋은 덕분에 얼른 발견했지만 마을로 들어가니 트럭은 이미 출발해 저 멀리 논 사이를 가로지르며 관지미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누가 탔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 시기 농사 준비와 관련된 일임을 직감하고 급히 쫓아 달려봅니다.

다행히 트럭을 시야에 잡아 10분 정도 따라 달리니 이월면소재지가 나왔습니다. 이윽고 도달한 곳은 이월농협. 이월면소재지를 지날 때 늘 보던 ‘은행’처럼 보이는 본점 뒤편에는 각종 농자재 창고와 관리시설, 주유소 등이 있었습니다.

새 농사를 준비할 때 가장 필수적인 준비물은 당연히 종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씨앗은 바로 토양에 심는 것도 있지만 고추 같은 것은 모종을 키울 판(파레트)에 담을 상토도 따로 필요하고, 흙을 덮기 위한 비닐이나 그늘막이 필요한 경우(이 작업은 멀칭이라고 하는데, 토양의 온도와 습도를 최대한 유지하고 잡초를 막기 위함입니다)도 있지요.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면 작물에 따라 각종 부수적인 시설 자재 또한 요구됩니다.

뿐만 아니라 소득을 목적으로 하는 농사는 상품성을 사수하기 위해 비료도 뿌려야 하고, 병해충을 막기 위해 으레 ‘농약’이라고 통칭하는 각종 약제도 챙겨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농자재가 필요한 까닭에, 이 무렵 전국의 농협 경제사업장은 ‘준비물’을 한꺼번에 구하기 위해 방문하는 농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같이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농협이라고 하면 거리 곳곳에 있는 농협 영업점을 생각하며 ‘은행’을 떠올릴 텐데요. 사실 농협의 금융업 비중이 커진 근래에는 농촌에 살아도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은행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렵기는 합니다만….

다른 은행들과 달리 농협의 사업은 크게 은행·카드·보험 등을 운용하는 신용사업뿐만 아니라 농자재·사료 등을 공급하고 농축산물 유통을 지원하는 (농)경제사업으로 나뉩니다. 애초 국가에 의해 농업·농촌·농민의 이익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탄생한 ‘농업협동조합’이니 만큼 이는 당연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베일에 쌓여있던 트럭의 주인은 유주영 이장님의 남편 김기형 씨였는데요, 그도 이날 농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농협을 찾았다고 하네요.

“간만에 일을 했더니, 바로 몸살에 걸려 버리네, 참.”

마지막으로 관지미를 다녀갔을 때, 겨우내 치우지 못한 하우스의 각종 농자재를 정리하고 있었던 그는, 이제 몸의 절반 이상을 서울에 걸쳐두게 만들었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 2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완전 전업 농사꾼으로 돌아갈 참입니다. 한바탕 몸살을 앓은 뒤 이제 수박을 심기 위해 필요한 농자재를 준비하러 온 것이죠. 그를 따라 ‘경제사업장’이라고 쓰인 커다란 창고건물 한 구석 사무실에 들어가니,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이 반깁니다.

“아고~ 수박밭엔 뭐 넣어야 되나? 비료 뭐 뿌려야 되는 겨?”

“수박은 밑거름으로 많이 나가는 게, 보통 탑XX 씁니다.”

“요즘은 또 토양살충제도 많이 뿌리는 것 같던데.”

이미 오랜 세월 농사를 지으며 농협 직원들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어 그런지, 아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구매가 이뤄집니다. 김씨는 ‘수박 하우스 다섯 동’이라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떤 제품이 필요하다 말하지도 않았건만, 직원은 작물과 규모만 듣고 비료와 약제를 추천하며 내역서를 작성해줍니다. 약제들 중에는 강렬한 이름으로 웃음 짓게 만드는 것도 있었습니다.

“핵폭X 쓸 거요. 형님?”

“이름을 만들어도 뭐 그리 끔찍하게 만들었나.”

“균핵, 균핵병 예방하는 거요.”

“그러게. 여기가 균핵이 많은 데라.”

“핵폭X 한번 날려바유. 붕산은 다섯 동이니까 세 개 하셔야 돼.”

금액은 17만5,000원. 전부 외상으로 하겠다는 김씨와 비료 2만5,000원 어치는 외상이 안 된다는 직원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 또 다른 여성농민이 들어와 서울에서 아주 내려왔냐며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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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농협 경제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이기세(왼쪽) 상무가 농자재를 구입하러 방문한 농민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무슨 나무 하시려고? 그냥 일반 과수나무죠? 싸XXX 드려.”

매실과 대추나무 잎에 쓸 살충제를 구한다고 하니 이번에도 척척 내어줍니다. 바쁘게 업무를 보느라 뒤늦게야 인사를 한 이기세 이월농협 상무님 말론, 농민 조합원들은 신용한도에 따라 외상구매 약정을 걸 수 있는데 최대 3년까지 무이자로 농자재 구매대금의 지불을 연기할 수 있다고 하네요. 또 ‘조합원 환원사업’이라고 해서 농자재나 농기계의 구매대금 일부를 할인해주는 형태로 조합원들에게 돌려줍니다. 아까 김씨가 구매한 농자재들도 2만5,000원 정도가 환원됐다고 표시됐었죠.

“여기가 가장 바빠지는 시기가 이제 막 시작된 거에요.”

농자재 판매대는 이즈음이 되면 ‘돗대기 시장’이 된다고도 덧붙입니다. 농협주유소에서 판매하고 있는 유류를 포함해 이 사업장의 농자재 1년 매출이 약 64억 원이나 된다고 하니, 관내의 많은 농민들이 농협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네요.

농민들이 한 번씩은 이곳에 들르니 사무실에서는 한 해 농사를 앞둔 농민들의 심경도 쉬이 엿들을 수 있습니다. 내촌리 신촌마을에서 왔다는 김범수(61)씨는 꽤나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던 수박농사를 접고, 새로운 농사에 도전한다고 합니다. 직전까지 밭을 돌보다 왔는지 흙을 씻어내지 못해 색이 변한 손이 눈에 띕니다.

“이제 수박은 재미없어. 그래서 그 하우스에 XX 한 번 심어볼라 그랴.”

“XX? 하이고, 또 모험을 하시는구만.”

“(근방에) 심은 사람이 하나두 없디야. 안디야(알아)?”

“안 돼, 정말 모험이여~.”

‘재미가 없다’는 말은 가볍게 들리지만 실은 무거운 표현입니다. 인건비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수익이 거의 나지 않았다는 호소, 그럼에도 소비자들이 가는 마트에서는 여전히 한통에 2만원에 가깝게 팔리고 있다는 푸념이 이어집니다. 이장님 댁 하우스에 갔을 때 20년 전 수박 가격과 지금 가격이 똑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또렷합니다. 똑같이 수박농사를 짓는 김씨는 호기심보다는 그가 더 큰 피해를 안게 될까 걱정부터 앞서는 모습이네요.

그래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농촌의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김씨에게 혹시나 피해가 갈까 싶어 새로 심는다는 작물명은 감춥니다. 관지미, 이월면, 그리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농민들이 올해가 끝날 땐 모두 웃을 수 있길 바라며 겨울철 마지막 방문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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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지미 김기형(왼쪽)씨가 농협 직원들과 함께 수박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구입한 농자재를 트럭에 실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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