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7회] 해방과 분단-북한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47회] 해방과 분단-북한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12.1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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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소련군에 항복하는 일본군의 모습.
소련군에 항복하는 일본군의 모습.

한 순간에 무려 17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두 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두 번째 원폭이 투하된 8월 8일 소련은 참전을 선언하고 곧바로 남하를 시작한다. 이틀 후인 10일에 일제가 버티지 못하고 항복의사를 표하자 한반도도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된다. 물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까지 여운형과 송진우, 방송국에서 일하던 몇몇을 빼고는 그 낌새를 알지 못했다. 일제 패망을 예측했던 박헌영조차도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을 받는 것처럼 해방을 맞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 소설가라는 서정주와 김동인은 8월 15일 오전까지도 무슨 친일단체를 만들어 볼 생각에 총독부를 찾기도 했다.

남한에 미군이 발을 딛는 게 9월 9일인데 반해 북한에는 그 한 달 전인 8월 9일 이미 소련군이 두만강을 넘기 시작했다. 해방 당일에는 청진에 입항했고 북조선 전역에 위수사령관을 배치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정 최고사령관인 제25군 치스차코프 대장이 들어오고 뒤이어 정치사령관 레베데프가 입북하면서 군정은 완전한 체계를 갖추었다. 물론 그 위에는 극동군 총사령부가 있고 또 위에는 군 최고사령관인 스탈린이 있었다. 소련군정을 미군정과 달리 민정이었다는 주장은 로마넨코 소장이 이끌던 민정사령부의 존재를 과장한 것이다. 민정사령부 역시 25군 산하 민정관리총국이었을 뿐이었다.

1945년 9월 19일 오전, 원산항 앞바다에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가 닻을 내렸다. 추석 전날이었다. 소련군 배가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원산시 인민위원장과 원산에 주둔해 있는 소련군에서도 두 명의 장교가 나왔다. 소련군과 더불어 수십 명의 조선인이 함께 내렸다.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푸가초프호는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이든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태우고 있었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로 김일성이었다. 또한 그 수십 명의 정체가 바로 김일성과 함께 하바롭스크 근처 브야츠크 산악지대에 머물던 소련군 제88정찰여단의 조선인 부대원들이었다는 것도 알 리 없었다. 김일성과 함께 입국한 이들은 그의 최측근 20여명이었다. 곧 북한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는 김책, 오진우, 최현, 김일, 박성철 등이 그 안에 있었다. 이들은 본래 자동차로 목단강까지 가서 기차 편으로 평양에 올 계획이었으나, 압록강 철교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하바롭스크로 발길을 돌려 소련군 운송선인 푸가초프호를 탄 것이었다.

원산항에 내리자마자 김일성은 부하들을 여러 도시로 파견하였다. 입국하기 보름 전쯤 스탈린을 만나 북조선 지도자로 거의 낙점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흥분해 있었다. 스탈린은 왜 서른네 살의 김일성을 북조선의 지도자로 선택했을까? 당시 조선에는 존경받던 민족주의자 조만식도 있었고 토착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에 3년이나 유학한 후 충실하게 소련 노선을 따른 박헌영, 연안파 거물 김두봉, 소련파 중에서 인품이나 정치적 능력이 탁월했던 허가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를 제쳐두고 소련군 대위 출신 젊은 김일성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의 개인적 판단이었다. 스탈린은 동유럽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맑스-레닌주의 이론가보다 군인 출신을 선호했다. 김일성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그가 3년 동안 소련군 제88정찰여단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소련의 명령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싫어했기 때문에 코민테른과 연결되어 활동한 전력 없이 빨치산 투쟁만 하고 다른 종파에도 관여한 적 없는 김일성에게 호감을 가졌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조선에서 항일투사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실제로 젊은 김일성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도 했는데, 당시까지 살아있던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보현이 등장함으로서 의심이 사라지기도 했다. 몇 차례 작은 고비가 있긴 했지만 결국 소련의 지지와 독립투쟁을 통해 얻은 명성으로 김일성은 비교적 손쉽게 북한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해방 후 평양에 등장한 김일성.
해방 후 평양에 등장한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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