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창경원⑤ 동물원 코끼리도 사람을 관람했다

  • 입력 2019.12.08 20:5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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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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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출세한’ 자식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 온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늘어놓은 첫 번째 자랑거리는 물론 창경원 구경이었다. (‘화신백화점 구경’도 자랑거리이기는 했다.)

특히 동물 중에서도 호랑이 등의 맹수를 보고 왔다는 자랑은, 아직 창경원에 안 가본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과 부러움을 자극하기에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때 전달자의 화법이 중요하다.

-야아, 황소보다 두 배나 큰 호랑이가 천둥소리 같은 포효를 내지르더니, 집채만한 바위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어서 내 앞에서 딱 내려앉아 입을 떠억 벌리는데….

어차피 과장과 허풍을 그럴 듯하게 버무려야 얘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신이 나는 법이다. 하지만 일반 관람객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큰 소리로 포효를 하거나,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번쩍 번쩍 뛰어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시골 사람들이 가장 불만을 터트리는 곳이 바로 호랑이나 사자 등 맹수 우리 주변이었다.

-야, 이놈의 호랭이야! 잠만 퍼져 자지 말고 일어나서 ‘어흥’도 좀 하고 뛰어댕게 봐!

-쯧쯧쯧, 호래이라고 어디서 영 시원찮은 놈을 갖다 놨구먼.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류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낮엔 대체로 잠을 잔단 말예요. 그런데 구경 온 시골 양반들은 무슨 놈의 호랑이가 종일 자빠져서 잠이나 잔다고 긴 나무막대로 들쑤시고 돌을 마구 집어던지고 성화를 부려요. 나중에 사육사들이 청소하러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 보면, 철책 너머로 던진 돌이 두어 삼태기씩이나 돼요.”

창경원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만 씨의 경험과 분석에 의하면, 동물을 구경하는 시민들의 태도가 경제 발전 수준에 따라 차이가 컸다.

가령 1960년대만 해도 워낙 가난했던지라, 구경나온 사람들이 ‘자기 배 채우기에 바빠서’(김정만 수의사의 표현), 동물들이 빤히 바라보는 철책 앞에서 음식이며 과일 등을 먹고는 약만 올려놓고 그냥 일어섰다. 긴 코를 날름거리면서 사과 조각이라도 던져주기를 바랐던 코끼리가 화가 나서는, 시골 노인의 하얀 두루마기에다 흙탕물을 내뿜어버리는 바람에 세탁비를 물어내라는 등 말썽이 생기기도 했다. 코끼리는 심히 약이 오르면 작은 돌을 코로 집어서는 쏘듯이 내던지기도 한다는데, 정통파 투수의 직구만큼이나 위력이 대단한 그 돌멩이에 맞아서 심각한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60년대에는 동물들이 아무리 입을 날름거려도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너 줄 음식이 어딨어 이놈아” 그랬었는데, 사회적으로 산업기반도 어느 정도 갖추어가고 수출도 해서 형편이 좀 나아졌던 1970년대부터는, 반대로 먹을거리들을 너무 무분별하게 우리 안에다 투척하는 바람에 그걸 말리고 통제하느라고 사육사들이 고충을 겪어야 했다. 이제는 사람들이, 기껏 던져줬는데도 안 먹는다고 오히려 성화를 부리며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짜식, 왜 안 먹어! 배가 불렀구나. 먹어 인마!

그랬다.

“문제는, 가령 원숭이에게 사과나 배를 통째로 주거나 칼로 반을 잘라서 주면 상관이 없는데, 다 주긴 아까우니까 반쯤 먹다가 던져준단 말예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결핵환자가 얼마나 많았어요. 그때부터 창경원의 동물들이 결핵을 비롯한 인수공통전염병(人獸共通感染病)에 걸리는 사례가 부쩍 많아졌어요. 동물에게 음식 주지 마라, 우리 안에 비닐 같은 거 던져 넣지 마라, 아무리 홍보를 해도 안 먹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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