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어떻게 키운 나락인디 수매나 잘 해주면 좋겠당게”

  • 입력 2019.10.20 18:3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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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그물망을 힘껏 추켜올릴 때마다 파도가 이는 것처럼 나락이 튀어 올랐다. 안명근 할머니는 쓰러진 나락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은색 그물망을 힘껏 추켜올릴 때마다 파도가 이는 것처럼 나락이 튀어 올랐다. 안명근 할머니는 쓰러진 나락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할머니가 40kg 포대에 나락을 담고 있다.
안 할머니가 40kg 포대에 나락을 담고 있다.
그물망 밖으로 떨어진 볍씨를 일일이 줍고 있는 할머니의 손.
그물망 밖으로 떨어진 볍씨를 일일이 줍고 있는 할머니의 손.
포대를 일으켜 세우는 할머니 모습 뒤로 고된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포대를 일으켜 세우는 할머니 모습 뒤로 고된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논 일 중에 제일 된 일이 쓰러진 나락 세우는 일이여. 남편은 진즉 가 불었고 애가 타서 (혼자) 며칠을 세웠네. 저그가 지리산 노고단이여. 아래 태풍 때 센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갖고 바람 간 길에 (있는 건) 다 쓰러졌어. 살다 살다 이런 태풍은 처음이라. 무서워서 집에서도 못 나왔당게. 세우기라도 했으니 이 정도여. 안 세운 건 나락이 시커매. 잘 말려도 그란께.”

세 번째 태풍 ‘미탁’이 몰고 온 바람은 온 사방 논을 들쑤시고 지나갔다. 나락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냥 뒤엉켜 논바닥에 드러누웠다. 드러누운 채로 비를 맞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나락을 묶어 세웠다. 이마저도 포기한 집들이 부지기수였다. 여러 날 고생 끝에 서마지기 논을 다 세웠다.

추수를 위해 콤바인을 불렀다. 작년만 해도 마지기당 5만원이었던 게 7만원으로 비용이 껑충 뛰었다. 마구잡이로 엎어진 논이라 기계를 부리는 농민도 손사래를 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놉을 얻어 추수를 겨우 끝냈다.

산수유문화관 앞 넓고 양지바른 주차장에 검은색 그물망을 깔고 나락을 펼쳐 놓았다. 다행히 가을볕이 좋아 사흘을 꼬박 말렸다. 동트기 전에 나와 뒤집고 해질녘 귀갓길에 또다시 나락을 살폈다. 펼쳐 놓은 나락 옆에서 사흘을 내내 살다시피 했다.

지난 14일 안명근(76, 전남 구례군 산동면) 할머니는 40kg 포대에 나락을 담고 있었다. 그물망을 조금씩 들어 올려 나락을 가운데로 모을 때마다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처음엔 손으로 쓸어 담고 이어 바가지로 퍼 담았다. 그물망 밖으로 떨어진 나락조차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40kg 포대를 일으켜 세울 땐 힘이 부친 듯 이를 악물었다. 포대 양쪽 귀퉁이를 잡은 노쇠한 손에 핏발이 섰다.

어느덧 포대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자 할머니는 동네 주민으로부터 이동식 저울을 빌려 왔다. 눈대중으로 헤아린 40kg를 정확히 재기 위해서였다. “이것 좀 들어줄 수 있는가?” 굽은 허리를 펴며 할머니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흔쾌히 포대를 들어 저울에 올렸다. 40kg를 기준으로 오차는 1~2kg 수준이었다. 남는 건 덜고 모자란 나락은 채워 놓고 하길 10여 차례, 세워둔 포대의 무게를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할머니는 “막막한 일을 끝냈다”며 거듭 고마워했다.

일 년 농사를 갈무리하며 한 숨을 돌리는 사이 넌지시 바람을 묻자 할머니가 답했다. “이기 어떻게 키운 나락인디 수매나 잘 해주면 좋겠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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