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④ 영도다리 이전에 부동산 투기가 있었다?

  • 입력 2019.10.1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식민지 시절에 일본군 기마병들이 말 타고 다니는 사진들 많이 봤지요? 그 기마대의 말들을 영도에서 기르고 관리했어요. 영도에 군마장이 두 개나 조성돼 있었거든요.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동을 출발한 선박이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려면 함경도의 나진으로 올라가야 하잖아요. 그 대형 선박을 타고 부산부두에 들어온 일본군은, 반드시 태종대 쪽에 건설한 육군휴양소에 머물렀다가 나진으로 올라갔어요. 한 번에 만 명도 오고 이만 명도 왔지요. 게다가 태종대에 서치라이트부대, 고사포부대, 해안포기지까지 설치했는데….”

영도의 향토사학자 부성수 씨의 얘기다. 물론 일제가 영도를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서 그러저러한 군사시설들을 구축한 것은 영도다리가 생긴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영도를 군사기지화 하겠다는 일제의 계획은 초장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부지 문제 때문이었다.

-영도에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 시설물들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땅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식민지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민간 소유의 땅을 강제로 징발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일본인 중에 하사마라는 사람이 이 곳 영도에 150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150만 평이나 되는 땅을? 하아, 그거 참 놀라운 일이로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하사마가 자신의 땅 중에서 100만 평을 일본육군성에 군사 용지로 희사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요.

부성수 씨에 의하면 그 시기 영도인구의 1/3이 일본 사람이었을 만큼 영도 거주민의 일본인 비율이 높았다. 그 중에서도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라는 사람은, 영도는 물론 부산일대에 땅 부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긁어모았다고 알려진 하사마가 정상적인 경로로 그 많은 식민지의 땅을 소유했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내막까지 탐색할 겨를이 없으므로 넘어가기로 하겠는데, 그렇다면 그는 진정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국충정으로 토지를 기부하겠다고 나섰을까? 부성수 씨는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자신이 소유한 150만 평 중에서 100만 평을 순전히 ‘뇌물’로 준 겁니다. 그 약삭빠른 고리대금업자는, 다리가 놓이면 영도 땅값이 훌쩍 뛸 것이라는 걸 미리 계산을 했던 거지요.”

나중의 일이지만 영도다리가 건설되어서 교량의 상판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질 때마다 구경나온 사람들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와, 저거 보라카이. 다리가 막 하늘로 올라가네!

-다리만 올라가는 기 아이라. 하사마의 땅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막 올라간다카이!

다리 개통 직후에 영도의 땅값이 세 배나 껑충 뛰었다는 게 부성수 씨의 증언이다.

자, 일제로서는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연륙교 공사부터 밀어붙이면 된다고 여겼는데, 교량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복병이 나타났다.

-영도에 다리를 놓는다꼬? 택도 없는 소리 말라 캐라!

당시 부산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선주(船主) 단체에서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