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3] 식민지의 농민들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3] 식민지의 농민들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9.01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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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33회>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마친 1918년 무렵 우리나라 총 경지면적은 500만 정보에 육박하였다. 불과 8년 만에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늘어난 농지가 농민들의 생활 향상으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았다. 같은 기간 지주는 두 배로 늘어났고 특히 일본인 지주 9만명이 전체 토지의 37%를 소유하고 소작료를 받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전 민인의 80%가 농민이었으므로 농민들의 고통은 곧 모든 이의 고통이었다.

새롭게 지주가 된 일본인들과 일제에 빌붙은 자들, 예를 들어 서울의 이완용, 공주의 김갑순, 광주의 현준호 등 지방마다 거대한 땅을 소유한 지주들이 농민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계속 토지를 사들였다.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소작, 반소작 농민들은 이전 전통시대보다도 더 가혹한 소작료에 시달리게 되었다. 지역이나 지주의 인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소작료는 최저 4할에서 최고 9할에 이르렀다.

일본으로 실려가는 쌀.
일본으로 실려가는 쌀.

그렇게 농민들에게 수탈한 쌀은 일본으로 실려갔다. 소규모 항에 불과하던 마산, 군산, 목포 등은 쌀과 콩을 실어 나르는 대규모 항만으로 성장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후 10년 동안 일제는 5년간은 해마다 100만 톤, 다음 5년에는 무려 220만 톤씩 소위 무역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쌀과 콩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춘궁기가 되면 쌀값이 치솟아 도시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소작 농민들은 굶어죽는 일이 속출했다. 반면에 조선의 쌀과 콩 덕분에 일본은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일제는 더욱 많은 쌀을 가져가기 위해 1920년대부터 소위 산미증식계획을 진행하는데, 대략적인 계획은 15년 동안 개간과 간척사업, 저수지 조성, 밭을 논으로 바꾸는 것 등을 통해 최대로 쌀을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1918년에 일본에서 쌀 파동이 일어나 도시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을 일본의 쌀 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쌀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오히려 쌀이 과잉되었고 일본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 계획은 1934년에 중지되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농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다. 소작인으로 전락한 대다수의 농민들은 지주나 마름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노예나 다름없었다. 기일 안에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지주가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도 있었다. 이에 일제와 지주에 대항하는 농민운동이 불붙기 시작한다.

1930년대 농촌 풍경.
1930년대 농촌 풍경.

농민들은 1920년대부터 소작인대표자회, 소작인조합 등을 조직했고 투쟁동맹인 아사기아동맹도 결성하였다. 1923년에 시작되어 1년여를 지속한 암태도 소작쟁의에서 처음 등장한 아사기아동맹은 말 그대로 뜻을 이룰 때까지 지주에 맞서 단식을 하며 굶어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농민들이 처한 상황은 처절한 것이었다.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일제의 정책과 연관이 있었다. 초기에는 소작쟁의를 일종의 생존권투쟁으로 인정하는 듯 하다가 쟁의를 소요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했던 것이다. 지주들은 일제의 비호를 틈타서 소작료를 더 올리거나 소작인들의 권리를 더욱더 박탈하였다. 이에 소작인들도 목숨을 걸고 싸움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작인조합은 1920년대 초반에 30여 개에 불과하던 것이 십년이 지난 후에는 1,300여 개로 늘어났다. 가장 큰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에서는 산하에 농민부와 소작인부를 두어 소작인조합 결성을 돕고 소작인대회를 여는 등 쟁의를 지도했다. 이후에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면서 농민조직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고 따로 분리되어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된 1928년에는 200여 개 산하단체와 수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렸다. 이들은 비타협적 투쟁 조직인 적색농민조합을 통해 치열하게 일제와 지주에 맞서 싸우게 된다.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이들 농민조직이야말로 일제하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이자 투쟁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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