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 대중투쟁의 ‘터닝포인트’, 수세투쟁!

  • 입력 2019.05.12 18:00
  • 기자명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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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여성농민들의 성장은 투쟁을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어린이날이나 한마당이란 문화행사를 통해서 다양한 경로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특별히 여성농민들의 투쟁력과 조직적 성장을 가능케 해준 전국적인 투쟁은 단연 수세투쟁이다.

수세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7년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1980년대부터 개방농정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파동과 1986년 9월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농산물 무역 완전 자유화 등 농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된 시기였다. 특히 1985년 전국적인 소몰이 투쟁이 전개되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각 부분의 이슈가 활발하게 제기되던 시점이었다.

반봉건의 청산, 갑오농민혁명 이후 최대 이슈

농민운동사에서 획을 그은 투쟁이 수세투쟁임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이 여성농민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기록한 기록물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여성농민운동의 관점에서 수세투쟁을 기록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럽다.

1987년 시작된 수세투쟁은 여성농민들을 마을부터 조직적인 투쟁으로 이끌어냈고, 마을, 면 농민대책위원회의 깃발과 구호가 휘날리게 만든 대중적인 투쟁과 조직의 경험을 새롭게 배우도록 만든 농민운동의 학교였다.

수세는 형식적으로는 농지개량조합이라는 조직에 조합원이 납부하는 조합비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것을 조합비가 아니라 수세(물값)라고 불렀다. 그것은 수세가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조합비가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던 수리조합에 의한 징세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즉 일제 식민지 잔재의 미청산으로 인한 지속적인 농민수탈의 도구였다는 점이다. 특히 벼농사가 지배적인 시대에 물은 농민의 생명이고 목숨줄이다. 그래서 물세를 받는 사람=수감은 농민들에게는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마마(천연두)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다.

당시 수세투쟁에 나선 여성농민 오분임(제2대 전남여성농민회 회장, 해남)씨는 수세투쟁 집회에서 물 관리하는 수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것들(조합직원)에게 당한 세월을 생각하면 가심에 한이 맺혀…. 가뭄 들면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 논의 물꼬는 막아 불고…논이 말라 벼가 타들어가도 물세는 꼬박꼬박 걷어가고…저수지에서 새비(새우) 잡아서 팔믄 뺏어다가 잡아가고…이 한을 어디다가….”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 수세는 식민지 잔재의 유물이었고, 쌀이 지배적인 농업구조에서 농민을 압박하는 탄압의 상징이었다. 그 동안 참아왔던 농민들의 투쟁은 수입개방으로 삶이 벼랑에 내몰리면서 1987년 대투쟁의 영향을 받아 반세기의 한이 폭발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농민들의 역할은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나타났다.

수세투쟁은 전남에서 출발해서 전국을 휩쓴 갑오농민혁명 이후 최대의 투쟁이었다. 여성농민들이 수세투쟁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85년 새마을운동중앙회(회장 전경환, 전두환의 동생)의 수입소 파동으로 소값이 개값으로 폭락하자 농민들이 전국적으로 대규모 소몰이 투쟁에 나섰다. 이 때 여성농민들은 경찰의 방패와 곤봉세례를 옷핀으로 찌르며 저지선을 돌파하여 그 동안 소규모 그룹 중심의 운동에 대한 농민운동의 각성을 일으켰다.

이러한 힘은 다시 수세투쟁을 통해서 마을부터 시(군)으로 연계되는 대중조직 모형, 방식 등과 연계되면서 고추제값받기 투쟁, 의료보험료 현물납부 투쟁, 소작지 불하 투쟁 등 다양한 투쟁의 반면교사 노릇을 했다. 수세투쟁은 농민을 단련시키는 장소였고, 농민들의 의식을 높이는 학교였으며, 상향식 대중조직(마을, 면, 군·시)을 만드는 훌륭한 훈련장이었다.

1980년대 말 수세투쟁과 고추투쟁은 현장의 농민들과 소통하며 일궈낸 대표적인 대중투쟁이었다. 1988년 전남 무안에서 열린 고추 제값받기 투쟁을 그린 만평(왼쪽)과 같은해 3월 열린 2차 나주농민대회 당시 모습.
1980년대 말 수세투쟁과 고추투쟁은 현장의 농민들과 소통하며 일궈낸 대표적인 대중투쟁이었다. 1988년 전남 무안에서 열린 고추 제값받기 투쟁을 그린 만평.

본격적인 아스팔트 농사, 그리고 승리의 환희

여성농민들이 투쟁에서 했던 초기의 역할은 마을별로 투쟁 참가자들의 밥을 짓는 일, 소깃발을 다는 대나무 가지 만드는 일, 버스 대절 투쟁 시 식사를 준비하는 일, 투쟁대오에 함께 하는 일 등 보이지 않게 투쟁이 가능하도록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동안 농민투쟁은 가농이나 기농 등 회원 중심 투쟁이었다면 수세투쟁은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 방식이 전환되었다.

직접 수세고지서를 걷어서 반납하고, 대규모 마을방송(가두방송)을 실시하고, 소규모 소자보를 활용하여 지역에 배포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투쟁방식, 투쟁조직으로 변모하였다. 작지만 쌈짓돈을 털어 모금을 하는 할머니들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버스 대절 투쟁에 식사를 맡아하고 거리에서는 앞장서서 투쟁에 참여하는 등 여성농민들의 참여는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나주지역 수세거부운동사를 집필한 박철환씨도 당시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 중 여성농민들이 30%가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농민들은 수세투쟁에서 단순참여, 보이지 않는 역할, 집회에 앞장서서 싸웠지만 수많은 대책위원회에서도 위원으로 선출되지도 기록되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기록된 것은 나주에서 주향득씨가 수세대책위원회 간사(옥산2구 인읍마을 대책위원장)를 맡아서 싸우다가 구속되었던 기록 이외에 여성농민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경험은 1988년 무안 의료보험 현물납부 투쟁(위원장 이정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초대회장)에서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의료보험료 절대 못내!”라는 구호로 전환되어 전국 최초로 여성농민들이 주도하는 집회가 추진되었고, 수세투쟁 때와 마찬가지로 의료보험료 고지서를 걷어서 반납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후 1988년 10월 26일 무안 수양촌에서는 고추 제값받기 투쟁이 고송자(당시 기독교농민회 회원, 이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전남도의회 의원 역임)씨의 주도하에 고추값 제값받기 마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서 당시 kg당 600원 하던 고추를 2,000원에 수매하도록 만들었다. 이 투쟁의 승리는 결국 전국의 고추농가들에게 전파되었고 이후 1989년 2월 13일 여의도 투쟁으로 확산 연계되었다.

당시 2.13 여의도 대회의 공식 명칭은 ‘부당수세 폐지 및 고추 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였다. 논의 대표작물은 쌀농사이다. 물은 쌀농사의 목숨줄이다. 밭농사의 대표적인 돈이 되는 환금작물은 고추이다. 또한 여성농민들의 노동이 생산에서 수확, 가공까지 가장 많이 투하되는 대표 농작물이다. 이러한 농작물이기에 가격투쟁에서의 승리는 여성농민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제 그 무엇도 여성농민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십 년 억압에서 잠들고 있던 영혼이 권리를 찾아 눈뜨기 시작했고, 여성농민들의 뿌리까지 흔들어 깨웠다. 이후 우루과이라운드, 쌀 투쟁, FTA 반대 투쟁 등 모든 투쟁에서 수세투쟁 때 사용된 가두방송, 마을홍보, 소자보 붙이기, 깃발, 손깃발 등 전술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래서 수세투쟁은 여성농민에게 있어서 운동을 가르친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투쟁이 공개적, 마을단위 대표성을 기반으로 한 조직체로 전환되었고 그것이 바로 전여농과 전농인 것이다.

1980년대 말 수세투쟁과 고추투쟁은 현장의 농민들과 소통하며 일궈낸 대표적인 대중투쟁이었다. 1988년 전남 무안에서 열린 고추 제값받기 투쟁을 그린 만평(왼쪽)과 같은해 3월 열린 2차 나주농민대회 당시 모습.
1980년대 말 수세투쟁과 고추투쟁은 현장의 농민들과 소통하며 일궈낸 대표적인 대중투쟁이었다. 1988년 3월 열린 2차 나주농민대회 당시 모습.

대중투쟁, 준비와 공감이 중요하다

농민운동은 수세투쟁 이후와 이전으로 구분해도 손색이 없다. 그것은 여성농민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투쟁의 공식적인 대표는 아니었지만 투쟁의 방법, 승리의 기쁨, 하면 된다는 자신감까지 모든 것을 가져다준 투쟁이 1980년대 말 수세투쟁과 고추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의 승리는 당시 모든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닿아 있는 쌀, 고추와 연계된 투쟁이었다는 점과 더불어 투쟁을 활발하게 이끌 수 있는 활동가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수세투쟁이나 고추투쟁 모두 그 이전부터 기농, 가농 혹은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 현장으로 투신한 활동가들이 헌신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대중적 방식의 투쟁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마을단위 교육을 통해서 농민들의 인식을 바꾸고, 현장에서 전파하기 쉬운 구호를 현장 농민들로부터 만들어내고, 마을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주민 스스로의 대표성을 위임받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즉 대중에 의해,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공감 백배 넘치는 투쟁이었다.

지금은 농민운동 활동가들의 재생산도 어렵고, 농민들의 삶의 방식도 다양화되었다. 또한 1980~1990년 농민대중 투쟁을 경험했던 승리하는 농민운동을 했던 세대들은 이미 여든에 임박하여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도 많다. 다시 거리투쟁을 통해서 아스팔트로 나서기에는 힘겨운 나이가 되었다. 당시 반짝이던 청년들은 이제 예순을 넘어서고 있다. 또 다시 승리하는 거리투쟁을 하기엔 우리 운동은 늙었을까?

수세투쟁의 경험이 여성농민운동에서 여전히 의료보험, 고추제값받기, 쌀값 보장, WTO 홍콩 투쟁으로 이어졌지만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지 않은가? 여성농민운동사를 정리하다 보니 새삼 돌아보게 된다. 여성농민 대중의 기본바탕의 욕구, 마을로부터라는 아래로부터 공감하는 운동에 대한 고민을 더 절실하게 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세투쟁을 이해하지 않고서 조직의 건설과 확장 그리고 침체, 우루과이라운드와 쌀 투쟁, WTO 등 모든 투쟁에서 마을 선전전이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국적인 투쟁의 힘은 집회에 참여·비참여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대중과 얼마나 공감하면서 투쟁을 전개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여성농민운동은 수세투쟁 이후 오히려 전국단위, 중앙단위 집중 투쟁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단위 투쟁에 적극 결합하거나, 지역 내 여성농민들과 함께 하는 대중 투쟁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이는 농민투쟁의 방식과 더불어 농민회와 관계 문제 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후 글에서는 쌀 투쟁과 학교급식, WTO 반대 투쟁, 각종 농업제도 개혁 투쟁, 정치세력화, 국제연대 투쟁 등 여성농민운동이 전개한 투쟁에 대해서 좀 더 분야별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한다. 여성농민들의 활동이 기존 농민회의 투쟁과 함께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자리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에 주목합니다. 새해를 맞아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가 시간을 되짚으며 풀어내는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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