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쟁기질, 여성농민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깊은 쟁기질, 여성농민이 만들고 싶은 세상은?
  • 오미란 젠더&공동체 대표
  • 승인 2019.04.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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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흔히들 현대사회를 대의 민주주의라는 명목하에 뭔가를 바꾸기 위한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한다. 물론 선거는 중요하다. 대표성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 누구의 이해를 대별하는가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진보적인 정당의 후보라고 해서, 혹은 여성 후보라고 해서 여성을 대별하거나 여성의 삶을 개선한다는 보장이 없다.

여성농민의 입장을 대별할 수 있는 정치파트너가 없다면 여성농민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정치인은 극소수이다. 특히 여성농민과 관련된 정책의 추진과정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수많은 방법 중에 여성농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투쟁만이 아니라 여성농민들의 삶을 바꾸는 기획으로 여성농민운동의 정책과제 실현을 위한 추진 활동을 중요한 정책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생산의 주체·삶의 질 향상·사회변화의 주체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삶을 바꾸는 실질적인 힘은 단순한 대표성이나 구호보다는 당사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변화가 충족되어야 한다. 여성농민운동의 역사를 보면 스스로의 삶의 변화를 만들고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향해서 얼마나 오랫동안 쉼 없이 전진해 왔는지를 볼 수 있다. 그 동안 여성농민들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시도가 있었겠지만 핵심은 수십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한결 같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정책개선 활동을 전개해 왔다는 점이다.

여성농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개혁을 위해 정책제안을 적극적으로 시작한 것은 1992년 <여성농민개혁안>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여성농민개혁안은 3대 목표 총 14개 과제를 포함하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정책적 요구이다. 1992년 발표된 여성농민개혁안은 여성농어민의 농업생산 주체로서의 지위와 권한 확보, 여성농민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 시행 및 농어촌 제반 환경 개선, 여성농어민의 사회참여를 높이기 위한 제반 정책 시행이라는 3대 목표를 중심으로 14개 항목의 개혁과제를 제시하였다.

14개 개혁과제는 여성농민의 노동가치 실현, 여성농민 농작업 기계화, 기반정비, 전문 영농인으로 성장 지원, 농수축협 사회참여 보장, 농산물 가공·제조·판매 지원, 건강권 및 모성보호, 국공립탁아소 설치 운영, 학교급식 전면 실시, 주거환경개선, 사회시설 설치(센터), 연금 등 복지서비스, 학습지원, 농촌 봉건의식 타파, 지역사회 여성참여 확대 등이다.

여성농민운동 단체들은 이러한 과제를 2000년에는 10대 과제로, 2016년에는 농촌지역의 성평등 실현을 추가한 4대 목표 20대 과제로 제시하면서 여성농민들의 변화하는 삶의 현실을 반영하여 추진해 왔다. 여성농민운동의 핵심으로 제시한 정책과제 중 이미 실현된 연금, 학교급식 등을 제외하고는 토종씨앗, 여성농민 국제연대 등 새로운 과제를 포함하여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여성농민운동의 역사는 한편엔 투쟁, 한편은 정책개선이라는 두 가지 실천사업이 지속적으로 전개됐고, 여성농민들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정책의 추진을 위해 투쟁만이 아니라 정책토론을 실시하거나, 총선이나 대선시기에는 각 당에 정책 공약 안을 제시하거나, 여성농민 출신들의 후보 진출을 통해서 여성농민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성과는 여성농민정책담당관실 설치, 여성농업인센터 운영, 농가도우미제도 실시, 학교급식 시행, 연금지원, 밭작물직접지불제 실시, 농번기 마을 공동급식, 농수축협 복수조합원제, 행복바우처 시행, 공동경영주 등록 등 크고 작은 정책 성과물을 통해 여성농민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농민들은 변화된 정책을 체감하기 어렵고, 삶을 바꾸기 위한 정책개선 욕구는 더 높아만 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여성농민들의 삶에 영향을 준 대부분 정책들이 중앙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기 보다는 지방정부의 사업이 대부분이고 이러한 사업이 시행되기까지 여성농민운동 단체들이 집요하게 정책적 요구를 통해서 만들어야 하는 정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의 경우는 오히려 중앙정부의 정책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뒷걸음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농민들은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여성농업인 정책을 추진할 전담부서의 부재로 보고 2000년부터 20여 년 동안 여성농업인 정책 추진체계에 대한 정비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였고, 이러한 문제제기에 힘입어 여성농업인기본법의 개정과 더불어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와 지자체(나주, 부여, 충남도 등)에서도 이와 관련된 정책개선이 시도되고 있다.

2007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현애자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주최한 ‘농정의 주역, 여성농업인 권리 보장을 위한 대토론회' 모습. 필자 제공
2007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현애자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주최한 ‘농정의 주역, 여성농업인 권리 보장을 위한 대토론회' 모습. 필자 제공

수십 년 간 퇴보해 온 여성농민 정책 되돌려

여성농민운동 단체가 없었다면 현재 여성농민의 삶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마도 여전히 농가는 있지만 농민(여성농민)은 없는 농업정책이 더 깊어졌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게 상상할 수 있다. 여성농민운동의 힘은 그 자체로서 여성농민의 존재를, 농가가 아니라 개별농민의 존재를 포함한 정책의 시행을 견인해 온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여성농민 정책의 후퇴를 보면서 여성농민운동이 없는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여성농민운동의 흑역사의 대표적인 형태는 여성농민전담조직의 약화이다. 1998년 김대중정부의 여성정책관실 설치에 의해 여성농업인을 위한 정책 추진체계로 여성농업인정책담당관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여성농업인정책담당관실은 이후 유야무야 여성정책과로 바뀌고, 그 이후 농촌사회과 여성정책팀으로, 최근에는 농촌복지여성과로 변경되면서 여성농민 관련 정책은 모두 지방으로 이양되고 여성농업인 정책 추진체계는 점점 축소되어 여성농민은 블라인드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여성농민들을 지역리더로 육성하자던 여성농민 교육 역시 여성농민 교관양성, 리더십 교육 등을 통해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흔적도 없이 폐지되었고,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던 여성농업인센터 역시 지방으로 이양된 이후 2005년 37개로 시작한 센터가 15년 동안 겨우 51개로 정지하다시피 머물러 있는 정도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농민 정책의 뒷걸음질은 여성농민운동의 핵심과제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돌려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여성농민운동은 정책의 핵심 과제로 중앙-시-군 여성농민 전담부서 설치, 1군 1여성농업인센터 설치 등 여성농민의 정책 추진체계를 다시 정비하고 수립하는 것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여성농민들의 농업기여도나 지역사회 역할 증진을 얘기한다. 그러나 여성농민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고려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없다. 오로지 여성농민의 운명은 여성농민 스스로 개척하고 돌파하는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여성농민들은 결코 멈춰 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만든 정책에 대해서 내세우거나 자랑치지도 않았다. 그저 여성농민의 삶을 바꾸는 멀고 험난한 길을 당당하게, 끈질기게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여농 주관으로 열린 ‘농민수당의 올바른 실현을 위한 토론회' 모습. 여성농민들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 정책은 여성농민들 당사자가 운동을 통해서 시행하도록 견인한 경우가 많았다. 한승호 기자
지난해 10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여농 주관으로 열린 ‘농민수당의 올바른 실현을 위한 토론회' 모습. 여성농민들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 정책은 여성농민들 당사자가 운동을 통해서 시행하도록 견인한 경우가 많았다. 한승호 기자

여성농민 정책, 아래로부터의 변화

여성농민들의 삶을 바꾸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아래(지역)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많은 농업정책은 지역보다는 중앙에 의존하고 있고 여성정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성농민과 관련된 정책은 아래로부터 시작해서 전국화돼 가는 사례가 빈번히 발견된다. 반대로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이양된 여성농민 복지관련 사업들은 길을 잃고 헤매거나, 사업의 실효성을 무력화 시키는 경우도 왕왕 발견된다.

여성농민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체감도가 높은 정책은 여성농민들 당사자가 여성농민운동을 통해서 시행하도록 견인한 경우가 많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사업을 들라면 단연 농번기 마을공동급식과 여성농업인 행복바우처 사업이다. 두 정책의 공통적인 특징은 지역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여성농민들의 정책만족도가 크고,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지나 지원이 없다는 점이다.

대표사업인 농번기 공동급식의 경우 전남 나주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산된 정책(2005년 제2차 여성농업인기본계획 토론회에서 제안된 정책을 나주시여성농민회(홍정순, 다시면)에서 나주시장에게 필요성에 대해 제안하여 전국사업으로 확산시킴)이고, 현재 전남도의 경우 1,000개 마을 이상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전국 광역지자체별로 각 50~230개 마을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행복바우처의 경우는 충북도 지자체 사업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각 시도 여성농민단체들이 전면실시를 요구하여 전국으로 확산한 정책(현재 지급액, 사용처 등은 천차만별임)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은 여성농민들의 농번기 노동경감, 마을공동체 회복, 삶에 직접적인 개선 효과를 주는 정책들이고, 여성농민운동의 지속적인 정책적 요구를 통해서 확산시키고 만들어낸 정책이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정책 이외에도 여성농민운동을 통해서 제기되었던 학교급식 실시, 연금지원 등의 과제는 현재 전국적인 사업으로 전개되어 국가정책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논농업 중심으로 지급되던 직불제를 여성농민단체들과 여성농민출신 의원(현애자, 당시 민주노동당)의 발의를 통해 밭작물직접지불제 제도를 추진·시행하여 전체 농업에서 농민의 공익적 가치를 확산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농촌공동화를 얘기하면서도 출산, 보육 등의 정책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산부인과도 어린이집도 없는 농촌지역이 점점 증가하는가 하면 농가도우미(출산도우미) 이용률이 0명인 지역도 부지기수이다. 정말로 시군단위에서 아이를 낳은 사람이 1명도 없었을까? 현재 여성농민의 삶을 둘러싸고 추진되는 다양한 정책들을 보면서 시군단위 여성농민운동이 없었다면 여성농민의 삶의 질은 얼마나 더 하락할까라는 우려가 든다.

어떤 정책들은 수십 년 동안 외치지만 메아리만 울리고 있기도 하다. 그 중 대표적인 정책과제는 농협의 개혁과 여성농업인 법적지위 및 생산주체 인정이다. 지난 3월 실시한 전국동시조합장선거에서 농축협의 여성조합장은 1,113명 중 8명으로 0.007% 수준이고 농민수당 등 최근 전개되고 있는 정책은 여성농민이 배제된 농가단위 정책으로 여성농민의 생산주체화는 여전히 멀기만 한 과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성농민운동은 이러한 지난한 과제들을 안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안을 만드는 여성농민운동

역사의 굽이굽이를 물결치며 넘어온 여성농민운동을 보면 힘겨운 걸음을 지치지 않고 걸어가는 질긴 생명력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생산주체, 사회주체, 삶의 질 실현, 성평등 정책을 위해 길고 긴 역사를 가뭇가뭇 포기하지 않고 끌고 오는 힘. 토종씨앗을 지키고, 여성농민 생산공동체로 대안적 조직을 향한 꿈틀거림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힘은 더디가지만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명을 살리는 근원적인 힘을 가진 땅의 사람들 여성농민, 그래서 그들은 현재도 미래도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의 대안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그래서 여성농민들에게 여성농민운동은 대안이며 친구이며 동반자이다. 더디지만 함께 가는 도전을 통해서 마침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모든 자리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에 주목합니다. 새해를 맞아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가 시간을 되짚으며 풀어내는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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