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이슈]아스팔트서 끝맺는 2018 농민운동

정쟁 탓 개헌 무산에 빛바랜 농민헌법
농민수당 도입 원년 … 전국으로 확산
쌀 목표가격 쟁취 위해 국회 앞 ‘새우잠’

  • 입력 2018.12.23 01:28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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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밥 한 공기 300원 보장, 직불제 개편 밀실야합 중단’ 전국농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농민들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의원실을 항의방문한 뒤 국회 정문 앞에서 마무리집회를 하며 “밥 한 공기 300원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밥 한 공기 300원 보장, 직불제 개편 밀실야합 중단’ 전국농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농민들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의원실을 항의방문한 뒤 국회 정문 앞에서 마무리집회를 하며 “밥 한 공기 300원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날 농민들은 적폐세력을 몰아내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리고 대단히 성공했다. 아스팔트 농사가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갈아엎었다고 생각한 나라는 사실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 해, 두 해를 거치며 새 정부에 실망한 농민들의 투쟁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농민의 권리는 오롯이 농민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다시 마주했다. 올해를 관통하는 굵직한 농업 의제 몇가지를 통해 2018년 농민운동을 되돌아본다.

농민헌법, 고래싸움 사이 새우등

그새 모두에게서 잊히고 말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정개혁 제1의 돌파구는 ‘개헌’이었다. 후보시절부터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한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촛불정신까지 언급하며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각 정당들도 개헌의 필요성에는 부정하지 않았던 만큼 민의를 반영하는 열 번째 개헌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농민들은 이를 다시없는 기회로 보고 그간 농업의 가치에 대해 부실하게 언급하고 있었던 헌법을 대폭 수정하고자 했다. 대선을 계기로 개헌이 화두로 떠오르자, 진보 진영 농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농민헌법운동본부’는 이미 2017년부터 공론화를 주도하며 그해 12월 ‘농민헌법’의 초안을 완성했다.

‘농민헌법’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는 헌법을 말한다.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경자유전의 원칙을 바로 세우고, 모든 국민이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이를 위해 농업의 다원적·공익적 기능을 인정하는 한편 농민의 생존권을 위한 적정한 소득을 보장하도록 했고, 농업에 대한 포괄적 범위의 국가 지원 의무, 여성농민의 지위 향상 등도 내용에 포함됐다.

그야말로 전 농업계의 기대가 쏠려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농민헌법 토론회와 농민설명회가 열렸고, 농협은 농민단체들을 한데 모아 추진연대를 세우고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농민헌법에 동의하는 국민 1,100만 명의 서명을 모아 홍보에 내세웠다.

모든 농민이 뜻을 모았지만, 개헌 자체가 무산되면서 모처럼 만의 합심이 빛을 잃었다. 여야가 권력구조 개편안을 놓고 서로 끊임없는 물고 뜯기를 반복한 나머지 정치권의 개헌 합의는 성사되지 못했고, 결국 지방선거일에 개헌 여부를 함께 투표에 붙이려던 청와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여당 내부에선 권력 구조 개편안을 담을 수 없더라도 이번 기회를 통해 지방분권이나 인권 등 기본권만이라도 개혁하자는 주장이 등장했지만 소수의견에 그쳤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농민들은 여의도를 뒤집을 수 없었고, 그들의 고집은 불가항력과 같았다. 농민들은 그렇게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농민수당, 위에서 안 되면 아래서부터

대신 2018년은 ‘농민수당’의 원년으로 남았다. 농민들은 개헌 정국과 함께 다가오는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지역자치의 혁신을 통해 농업의 가치를 인정받을 중요한 기회라 보고 각지에서 대응에 나섰다. 농민헌법에도 명시한 ‘소득 보장’을 아래에서부터라도 시작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그 수단은 이전부터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 측면으로 전국농민회총연맹(의장 박행덕, 전농)이 주장해왔던 ‘농민수당’이었다.

선거기간 동안 전농의 각 지역조직들은 지자체장 후보자들에게 농민수당을 공약으로 채택하고 당선 뒤 즉각 지역농정에 반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회의 주도로 농정 공약을 검증하는 후보토론회가 열렸다. 민중당 등 진보정당의 농민 출신 후보자들은 일제히 ‘농민수당 실현’을 공약으로 내걸어 선거운동을 통해 여론 확산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대단히 성공적인 시도였다. 지방소멸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농민수당은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대책으로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지자체가 농민수당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거나 심지어는 일찌감치 도입을 확정했다. 특히 전남 지역은 ‘기수’ 역할을 도맡은 모양새인데, 오래 전부터 ‘농가경영안정자금지원’ 제도를 운영하며 사실상 1호 농민수당 도입 지자체로 평가받고 있는 강진군의 영향이 컸다.

전남농민들은 민중당과 함께 ‘농민수당 운동본부’를 결성해 지난 가을 전 시군을 순회하며 여론전을 펼치고 지자체의 참여를 유도했다. 그 결과 현 군수가 후보시절부터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해남은 가장 먼저 도입을 결정했고, 그 외에도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도내 대부분의 지자체가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도 차원의 농민수당을 특정계층 기본소득과 함께 2020년부터 도입하기로 공언한 상태다.

전남지역의 변화에 힘입어 농민수당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지역은 경기(농민기본소득), 전북(공익형직불제), 강원(소농직불제) 등으로 각자 명칭은 다르지만 광역지자체장들이 앞장 서서 농민수당에 기초한 농민 소득 향상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영남지역에선 아직 광역지자체 차원의 움직임은 없지만 경북 봉화군이 농민수당 도입을 눈앞에 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제도의 확산은 현실이 됐고, 남은 과제는 수령액의 증대다. 도입을 확정지은 시군의 경우를 보면 대개 연간 금액 50만원에서 70만원 수준이다. 이를 240만원으로 올려 월수령액이 20만원 수준에는 근접해야 농민의 삶을 바꾸는 농민수당이 될 수 있다는 게 농민운동가들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선 광역지자체 차원의 농민수당 시행은 물론이고, 국가의 예산 투입을 이끌어 내기위한 법제화 추진을 이끌어내야 한다. 기초지자체도 불필요한 간접 지불(보조) 사업을 줄이는 등 농업 예산의 효율적 사용이 요구된다.

농민수당이 급속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기혼여성농민들이 수혜에서 배제된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현재까지 도입이 확정된 기초지자체의 농민수당들은 전부 농업경영체 등록을 자격요건으로 정해 지급한다. 명칭은 농민수당이지만, 실제로는 ‘농가수당’인 것이다. 경영주 대부분이 남성인 농촌현실에서 여성농민들에게 수혜를 보장하는 장치는 아직까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멀고 먼 ‘밥 한 공기 원가 300원’

올해는 5년에 한번 갱신되는 쌀 목표가격을 다시 정하는 중요한 해다. 변동직불제 실시 이후 지정된 목표가격은 늘 물가상승률을 무시하다시피 했고, 농민들은 그래서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농한기 투쟁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한편으론 ‘촛불정부’를 표방한 문재인정부에 대한 기대를 내심 버리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당정 협의 목표가격이 결국 19만6,000원으로 결정됐을 때 농민들이 지역과 소속을 가리지 않고 폭포처럼 쏟아낸 배신감에서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시절 21만7,000원대의 쌀값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에서 더 설명할 이유가 없다.

급조된 스마트팜 혁신밸리 사업과 엉터리 수급정책, ‘농’자 한 마디 없었던 대통령까지. 정권은 바뀌었어도 농민들이 거리에 나서야 했던 나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농민들에게 더 이상 양보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측면에서, 쌀 목표가격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농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지만, 국정감사장에 등장한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그 유명한) ‘19만4,000원+α”만 외칠 뿐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올해 마지막 투쟁을 시작했다. 지난해 대선 무렵 처음 등장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의 구호 ‘밥 한공기 300원’은 이제 지역과 소속을 불문하고 모든 농민들이 외치는 구호가 됐다. 크고 작은 집회가 여의도에서 줄을 이었고, 마침내 12월 초에는 여의도 한복판에 벼 톤백이 야적됐다. 하우스 비닐로 만든 농성천막에서 전국의 농민들이 교대로 새우잠을 자며 쌀을 지켰고, 얼마 후엔 톤백 양측에 트랙터가 도열했다.

꼭 2년 전 땅끝 해남과 진주에서 출발해 온갖 풍파와 위협을 이겨내고 여의도에 도착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의결을 압박했던 그 트랙터들이었다. 그야말로 농민들이 앞장서서 세상을 바꿨다고 생각했건만, 회한과 실망을 안은 채 여의도에 또 다시 트랙터를 내려놓게 될 줄 농민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농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의도에 내려둔 쌀을 지키며 농민의 가치가 바로서는 그날을 염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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