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씨 솎던 날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5

  • 입력 2008.06.01 00:03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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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20분, 드디어 자천 아지매들이 복숭아밭으로 왔다. 1년 만에 만나 인사를 하느라고 갑자기 들판이 부산해진다. 일흔 일곱 옥산댁 할매는 정정한데 60대 중반 대동댁 아지매만 많이 늙어버린 것 같다. 누구는 내 손을 잡고 반가워하는데 어떤 할매는 수줍게 낯을 붉히며 처녀처럼 나무 아래로 숨어버린다. 여자 품값으로 일 다니는 60대 초반 남자는 훨씬 더 늙어 보인다. 그런데 숫자를 헤아려보니 몇몇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 할마시는 어디 가가 다 팔아먹고 이 사람들밖에 안 데리고 왔노!”

“지랄한다. 다 늙은 촌 할마시들 살라카는데 있거덜랑 날 좀 팔아도고. 그 돈 받으가 우리 둘째아들 갖다 줄란다.”

대동댁 말이 심란하게 들린다. 그것을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옥산댁이 냉큼 받는다.

“아이고, 그카지 마소. 누구는 산에 가 눕었고, 누구는 병원에 가가 눕었고, 또 누구는 즈그 집 방구석에 드러눕어뿌렀구마. 올해 이 일 할 때 마이 바 두소. 내년 이맘때는 여기 중에 또 몇이는 안 보일끼시더. 나도 인자 다 늙은 년이 남의 일 하기가 눈치가 있어 안 올라카이 대동띠기가 하도 가자고, 가자고 목을 매이 할 수 없이 안 왔는기요.”

이른 아침부터 옥산댁 사설이 길어지다가 덕암댁 한 소리에 뚝 끊어진다.

“저 할마시, 삼동내 삼베만 삼더이 타령도 엔간히 길어졌구나.”

사람들은 자연스레 네 명씩 두 패로 나뉘어져 나뭇가지를 들춘다. 한동안 소리 없이 일에 열중하다보니 들판이 고요해진다. 거친 손들이 재바르게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느라 물 찬 제비 같이 날렵하다. 나는 사다리로 이쪽저쪽 높은 곳만 골라 다니며 바쁘게 씨 솎기를 하다 돌아보니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밭 한쪽이 환해졌다. 바닥에는 매실만큼 굵은, 솎아낸 복숭아가 자옥하게 깔려있다.

7시 40분. 나는 애마를 몰아 집으로 달려간다. 어머니는 벌써 국수를 삶아 담고 있다. 이 국수가 저 할마시들의 오늘 아침이다. 나는 구절양장으로 뒤얽힌 국수 뭉치를 이윽히 내려다보며 씁쓸한 비애를 느낀다. 멸치 우려낸 물에 저 근기 없는 밀가루와 약간의 정구지, 볶은 김 약간이 아침 대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 묘하게 입술을 비튼다.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일을 시작하자 ‘대통령과 촛불집회’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아무리 대통령이 잘못했기로 어린 학생들을 꼬드겨 길거리로 내몬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 대세였고, 그 대세에 눌린 소수 두엇이 무어라 항변을 하지만 혼잣소리였다. 촛불집회에는 분명한 배후세력이 있다고 확신을 하는데 한나라당 논리 그대로였다. 그 모든 것을 대동댁이 주도하여 이끌고 갔다. 그런데 묘한 것은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기름 값이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찌글찌글 웃으며 그 소리를 듣는 재미에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영남 마피아’들의 대통령 공격은 그만큼 신선도가 높다.

“정치를 그만치나 못한 노무현이도 안 올린 지름 값을 이명박이가 그만치나 올리이까 촌사람들은 똑 줄을따.”

유일하게 따라온 남자가 듣다못해 한 마디 푹 찌르고 들어간다.

“이명박이가 와 기름 값을 올리겠는기요. 그거는 절대 아이구마.”

“아이기는 머가 아이고! 하도 경제 살린다고 해싸서 찍어줬디이 이게 무신 나라고!”

“아이고, 아지매요, 기름을 파는 나라가 비싸게 팔아서 글쿠마. 어디 가서 그런 소리는 하지 마소. 듣는 사람들이 욕하는구마.”

“욕은 와 하노. 내 손으로 찍은 대통령이 잘 몬하믄 욕이라도 해야제. 안 글나?”

대동댁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동댁을 바라본다.

“와? 아재는 그쪽에 표 안 줬으이 꼬시하제.”

“그래, 우리 명박이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디 고거 참 아방시다.” 대동댁이 손으로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다가 휘청하더니 그만 상자 위에서 나뒹굴면서 잡고 있던 가지 하나를 부러뜨리고 만다. 옥산댁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소리 한다.

“몸은 다쳐도 괜찮지만 나무 다치면 안 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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