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당근 열사

  • 입력 2018.09.02 09:34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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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희(제주시 구좌읍)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사는 것이 견뎌내는 일임은 오랜 더위와 한 번 지나간 태풍만으로도 알게 된다. 7월 중순부터 씨를 뿌리고 8월이 되면 잔디 싹처럼 땅을 뚫고 서는 당근 싹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밭에 와서 한 번 봐주라.”

비가 오기만 하면 싹이 나련지 늦은 파종이라도 해야 할 건지 나에게도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낸다. 30년 넘게 당근 농사를 했다지만 판사처럼 결정을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촉촉한 땅에 씨를 뿌린 밭, 검은 흙밭, 모래땅, 바짝 마른 땅 모두가 발아조건이 다르고 씨가 움틀 수 있는지, 아예 씨가 죽어버렸는지, 움트고 나서 타버렸는지까지도 봐야 한다.

5,000평 당근 농사를 하는 친구에게 이 밭 저 밭 할 거 없이 다시 파종하라는 아픈 선고를 내렸다. 새 종자 값이 250만원, 트랙터 파종비 75만원, 물장비 400만원. 도대체 당근 농사로 얼마를 번다고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한숨을 내쉬지만 맨땅에 들어간 돈이며 수고를 생각하면 다시 씨를 뿌려 잎을 세우고 당근 모양이라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농사짓는 사람들이 안아야 하는 몫이다.

다시 파종을 하고 밭에 물을 주기로 했다. 말이 물을 주는 것이지 이 일은 전쟁이다. 한번 물을 주기로 맘 잡은 그때부터는 밤낮으로 물을 찾아다니는 귀신이 돼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물 받는 곳에서 줄을 서고, 급수지원차들이 오는 물빽에도 잽싸게 끼어들어야 했다.

“물은 언제까지 줘야 하는 거여.”

“비가 올 때 까지지.”

“잠은 다 잤다 마음먹어 사.”

무섭게 태풍이 와서 고마운 인사를 받고 돌아갔다. 사막 같았던 밭에 당근잎이 빼꼼히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올라온 것들은 어떻게든 커 갈 것이다. 태풍이 몰고 온 비 하나로 당근도 농부들도 버틸 힘을 내려 한다.

바람도 비도 잦아든 날 괜히 기분이 좋아 저녁에 밥 먹고 술도 먹자고 이 사람 저 사람 꼬시는데 다들 웃는 얼굴로 나왔다. 술이 먹힌 동네 후배가 한 소리를 한다.

“형 말 듣고 농사해서 20년 지났는데 이게 뭐꽈.”

나아진 게 있어야지 고생만 진탕한다고 그래도 미안했는지 마을엔 형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한다.

여름에 나온 농산물이 비싸다고 난리다. 올여름 10분만이라도 밭에서 같이 일을 해봤다면 땅에서 키우고 입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짐작이라도 할 것이다. 뚝딱 나온 커피도 5,000원을 줘야 먹는데 겨우 살려낸 수박이 비싸다고 물가는 농민들이 다 올리는 것처럼 말하면 쓰것냐!

오랜 더위와 태풍에도 버틴 모든 것들이 나의 땀과 정성으로 키워져서 귀하게 대접받기만 하면 우린 잘 견디고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잘들 자고 내일은 밭에 어린놈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보러들 가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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