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흰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8.08.26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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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이 사람ㅣ경남 거창 공기영 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나 태어난 이 강산에 농민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흰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일부다. 농민대회에서는 ‘군인’ 대신 ‘농민’으로 바꿔서 불렀다. 경남 거창의 공기영 씨는 ‘늙은 농민의 노래’를 떠 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30만 농민대항쟁’ 경찰 방해에 맞서다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로 출마했을 때야. 그때 농민회장이 정쌍은 씨였는데,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서 회장을 못하니까 비상대책위원회를 세웠고 내가 비대위원장이 된거야.”

젖소를 키우다가 진주 경상대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돼 거창군농민회 활동을 시작한 공씨는 2002년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30만 대항쟁을 준비하던 시기 거창군농민회 비상대책위원장이 됐다.

“농민 10만이 시위하면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대책을 세우지 않겠나. 그런 생각으로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게 됐지.”

1995년 UR협상이 타결되고 WTO체제에 들어서면서 농업은 전면적 개방의 국면을 맞게 된다. 정부는 농업의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구조개선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자금을 농촌에 쏟아 붓지만 사실상 농업의 구조조정이었고 대다수 농민들이 빚더미에 앉게 됐다.

개방농정으로 나날이 피폐해가는 농업·농촌의 현실을 알려내고 농정의 획기적 전환을 요구하게 됐다. 당시 전농에는 대규모 농민대항쟁을 통해 농민들의 절박한 사정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농정의 전환을 촉구하자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전농은 2002년 11월 13일 30만 농민대항쟁을 치르기로 했다. 30만명의 농민을 조직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집회가 농민회원 중심으로 참여했다면 30만 대항쟁은 대중적 참여를 유도해야 했다. 공씨는 이 집회를 10만 집회로 기억하고 있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서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홍보를 했어.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농민들 살기는 점점 어렵게 됐다, 정부는 농민들 억압하기만 한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까 자기들 멋대로 하는 거 아니냐, 서울로 가자.” 공기영 비대위원장은 마을 마다 찾아다니고 정자나무 아래, 면사무소 등 농민들이 모이는 곳이면 찾아가서 농민대회 참여를 독려했다.

“이렇게 농민들을 찾아다닌 끝에 거창에서 버스 53대가 가기로 했는데, 출발하기 전날 저녁에 농민회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어. 사무실로 나오라고. 저녁시간이 되니까 버스들이 하나둘 못가겠다고 취소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더라고.” 집회를 하루 앞두고 예약한 관광버스 취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집회 참석을 막기 위해서 경찰에서 관광버스 회사에 압력을 넣은 것이다.

“사무실에 나와서 저녁 9시쯤 경찰서장한테 전화를 했지. 대구, 김천에 예약한 차들이 무너지는데 내일 서울 못가고 경찰서로 갈 테니 그리 알라. 점심과 막걸리 다 준비해라. 서울 못가도 좋다 했지.” 예약된 버스가 취소되어 서울을 갈 수 없게 됐으니 모두 경찰서로 가겠다고 통보를 했다.

“경찰서 정보과장이 거창에서 관광차 모집하는 사람 3명을 불러서 밤새 차를 다시 수배했는데 새벽 4시에 50대를 채웠어.” 1년을 준비한 농민대회가 경찰의 방해로 무산될 뻔 했지만 공기영 비대위원장은 굴하지 않고 경찰을 압박해서 무사히 30만 대항쟁에 참석했다. 2002년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농민대회에서는 당시 대통령 후보인 노무현 후보가 연설 중에 농민들에게 계란 세례를 맞기도 했다.

‘늙은 농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농민, 공기영 씨가 지나온 삶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다.
‘늙은 농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농민, 공기영 씨가 지나온 삶의 내력을 이야기하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다.

장사로 사회생활 시작

“원래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고 25살에 대구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했어. 한 평도 안 되는 조그만 점포 하나 얻어서 장사를 시작했지.” 공씨는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가 고향이다. 무주군과 거창군의 경계인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도우며 지내다 20대에 대구로 나가 장사를 시작했다. 서면시장에서 여성 란제리, 장갑, 양말, 모자 등을 파는 도매가게를 하며 기반을 닦아나갔다.

“7년간 장사를 했는데 돈도 좀 벌었지. 당시에 정리하면 대구에서 집을 네 채는 살 수 있을 정도였어. 여기 촌에 한 골짜기는 다 사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서문시장에 화재가 났다. 1976년 12월 17일에 성냥불 실화로 추정되는 불이 발생해 650개의 점포가 전소됐다.

“화재가 나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상인회장이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걱정 말라더라고. 대구시는 서문시장에 화재가 자주 나니까 불탄 자리에 소방서를 짓겠다고 하고.” 결국 상인회장의 농간에 상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시장을 떠나게 됐다. 공씨도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때 조직적으로 활동하지 않으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이후 농사를 지으며 농민회에 적극 나서는 계기도 서문시장 화재의 교훈에서 나온 셈이다.

대구를 떠나 마산으로 가서 장사를 다시 시작하려 했다. “마산에 방을 하나 얻어서 들어갔는데 짐이 많다고 주인이 나가라는 거야.” 마산에서는 장사를 시작도 못하고 다시 진해로 내려갔다. “진해로 가서 노점에서 호떡 장사를 했어. 겨울동안 장사 잘했지.”

재기를 위해 노점을 시작했는데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서 중풍이 와서 사람도 못 알아보고 거동도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결국 공씨는 장사를 접고 다시 고향집으로 갔다. “집에 와 보니 몰라보더라고. 말도 못하시고. 그 길로 어머니 모시고 서울 경희의료원으로 갔어. 2주 치료하니까 다행히 걸음을 떼는데, 동생 돈 내 돈 전부 모아 가져온 거 다 떨어져서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모시고 고향집으로 내려 왔어.”

어머니는 병원에서 치료를 더 받고 싶어 했지만 그럴 형편이 안됐다. “집에 와서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나빠져 5년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어.” 공씨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께서 병을 얻어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돌아가시게 됐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이 평생의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세상과 맞서다

어머니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온 공씨는 젖소 송아지 5마리를 키웠다. “한우는 먹여 봤지만 젖 떨어진 젖소 송아지는 처음이었지. 우유타서 먹이고 했는데 설사를 해서 2마리가 죽었어. 당시에 한 마리에 350만원 주고 샀는데.” 어렵게 젖소 송아지 5마리로 시작해서 조금씩 늘리면서 집 위쪽에 축사를 짓고 낙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1980년대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사무총장을 하면서 소 수입에 관여하게 된다. 전경환의 무분별한 소 수입으로 인해 고공행진을 하던 소 값은 1983년을 고비로 하락세로 이어지며 급기야는 폭락하게 됐다.

이에 1985년 7월 경남 고성 농민들을 필두로 ‘소몰이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전국 20여개 시군에서 총 2만여 명의 농민이 참여하는 전국적 투쟁으로 불이 붙었다.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과 탄압이 극심한 시절에 농민들이 소를 몰고 거리로 나온다는 것은 충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농민들 삶이 어려워졌다는 것과 군사독재정권의 부패에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당시 한우를 키우는 농민들 뿐 아니라 젖소를 키우는 낙농가들도 우유가격 하락과 유업체의 과다한 불합격 처리에 항의하는 투쟁이 속속 벌어졌다.

낙농을 하는 공씨 역시 소 값 폭락과 우유 값 폭락으로 고심하던 차에 우연히 진주 경상대학교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됐다. “정부가 너무 무분별하게 소를 번식하게 하고 외국 소까지 들여와서 소와 우유가 포화상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시위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공씨는 생전 집회 같은 걸 해보지 않았지만 서문시장 화재 사건이 떠올랐다. “서문시장에 화재가 났을 때 우리는 상인회장만 믿고 있다가 아무것도 안됐는데 그 전에 화재가 난 4지구는 똘똘 뭉쳐서 보상을 받았어. 그래서 농민들도 뭉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이때 공씨는 거창군농민회장 정쌍은 씨를 만나게 됐다.

“진주에 있는 비락우유 공장 앞에서 열린 집회에 정쌍은 씨하고 참석했어. 그 때 차에 불합격 처리된 우유가 있었어. 농가에서 낸 우유를 검사를 해서 불합격되면 파란색 물감을 섞는데 그 우유 비우고 가자했더니 시위대 속에 있던 경찰이 내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는 거야.” 경찰은 농민들 기를 꺾으려고 공씨의 뺨을 때리고 사라졌다. 그는 이에 분개하여 단상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경찰이 농민을 때렸다. 내가 맞았다.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시민을 쳐도 되냐? 농민의 고통을 모르고 개돼지 취급한다. 나 때린 경찰 찾아내라, 하면서 한참 연설을 했어. 내가 소리소리 치자 그 자리에 있던 농민들 모두 자기 일인 양 분개했지.” 결국 공씨를 때린 경찰이 찾아와서 사과를 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됐다.

삶의 일부가 된 농민회

그렇게 시작한 농민회 활동은 공씨 삶의 일부가 됐다. 거의 매일 거창에 나와 회의하고 선전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젖소를 하니까 아침저녁으로 젖을 짜야 해서 저녁에 젖 짜고 버스 타고 거창읍내에 나가서 회의하고. 그러다 늦으면 사무실에서 자고 새벽에 들어와 젖 짜고. 그런 식으로 하면서 활동했어.”

그의 활동이 왕성할수록 아내의 고생은 더욱 커져갔다.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어. 우유를 짜면 마을 아래 큰길까지 가져다 놔야 차가 와서 실어가. 1988년 겨울 4박5일간 YMCA에서 하는 농민교육을 갔는데 집사람이 젖을 짜서 25킬로나 되는 우유통을 한 번에 두 개씩 들고 두 번 왕복해서 큰길까지 가져다 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래도 아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아내의 뒷바라지가 있어서 공씨는 헌신적으로 농민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YMCA 농민교육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어. 농민들이 왜 못살게 된 건지 알게 됐고 농민들도 뭉치고 싸워서 자기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

공씨는 YMCA 농민교육에서 알게 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헌신적으로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고 농민회 활동을 하다 돈이 부족하면 자신이 채워가며 활동 했다.

“젊어서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이제는 기운이 없네.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야. 젖소는 오래 전에 정리하고 한우 키우고 사과 과수원을 했는데 그것도 다 정리했어. 과수원 3,000평 있는 거 남 주고 지금 밭 1,500평에 작년에 사과묘목 심어놨어. 이것도 묘목이 어느 정도 크면 남 주려고 해.” 공씨는 올해 일흔이다. 농촌에서 많은 나이라 할 수 없지만 젊은 시절의 많은 활동과 고생으로 기력이 많이 약해졌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오늘 서울에서 아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어. 우리 손녀가 집에 오면 할아버지 집이 너무 멀다고 해.” 적막한 집안은 곧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으로 북적이겠고, 마당에 나와 손주를 기다리는 공씨는 아들 손에 들려 보내려고 널어 놓은 고추와 참깨를 손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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