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리 모두 이렇게 웃고 있는데…

  • 입력 2018.07.22 18:19
  • 기자명 임은주(경기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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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주(경기 여주)
임은주(경기 여주)

“선생님, 자꾸 전화해서 미안한데요, 바닷가에 못 간다고 하니 우리 가연이가 울면서 난리를 피우네요, 남편이 그냥 바다에 갔다 오래요. 이랬다저랬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자리 남아 있어요?” 친척분의 장례식 때문에 바다나들이에 못 간다던 혜인이 전화를 했습니다. “그럼! 잘 됐네! 내일 봐요.”

사는 곳 가까운 몇 군데로 정한 버스 승차 약속 장소에는 아이들과 엄마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설렘으로 가득한 얼굴들입니다. 세 번째로 친구들이 올라탄 뒤 버스는 주문진으로 출발했습니다. 기쁨에 들떠 소리 지르는 아이들에게 그러면 내년에는 절대 안 온다는 협박도 웃으며 하게 되고 더 늙고 뚱뚱해졌는데도 젊어지고 이뻐졌다는 빈말에 깔깔거리며 좋아합니다. 올해도 이렇게 한 번 떠나 봅니다.

11, 12년 전 즈음이었습니다. 여주여성농업인센터 앞의, 조용하기만 하던 버스정류장에서 왁자지껄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이게 뭔 일이 있냐 싶어 나가보니 아기를 업기도 하고 배가 나오기도 한 이주여성들이 몇 명 모여 그들의 말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왁자지껄한 그 소리가 거의 매일 들려왔습니다. 만날 데가 없어 버스정류장에서 저렇게 모이나보다 싶으니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시집와 말도 통하고 음식도 익숙했지만 처음 접한 여주는 낯설고 힘들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멀고 먼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낯선 곳에서 시부모, 시집식구들하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만나 앉아 있을 곳이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버스정류장으로 나가 잘 통하지도 않는 말을 하였습니다. 들어와서 쉬면서 이야기 하라고, 혹시 한글을 같이 공부할 수 있냐고.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한글을 공부하고 베트남 쌈을 해 먹고 베트남 말로, 태국 말로, 캄보디아 말로, 몽골 말로 서로의 일상을 묻고 힘을 주고받는 곳이 되어 10년이 넘었습니다. 연하는 2007년에 태어났고 갓난쟁이였던 연하를 안고 한글을 가르치면서 찍힌 사진이 있어 여주여성농업인센터에서 이주여성교실을 시작한 게 2007년부터인가 싶기도 하고 연하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공부를 한 것 같은데 이주여성교실을 시작한 게 2006년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들과 만난 지 11년인지 12년인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이주여성교실을 위해 봉고차를 몰고 가면 늘 눈물바람으로 나왔던 친구, 시어머니에게 맞아 찢어진 옷에 맨 발로 한겨울에 아기를 업고 택시를 탔던 친구, 남편이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말로 소리를 지르며 온 살림을 때려 부술 때 벌벌 떨던 친구, 시어머니가 무서워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는데 친정에 쫓아온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와 아이 때문에 다시 시집에 와야 했고 그 후로 오랫동안 가스불 놔두고 장작불 피워서 밥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친구, 더 이상 못 참아 집을 나왔다며 한밤중에 전화한 친구, 술에 취해 도대체 뭐를 가르치길래 술 먹는다고 집사람이 저렇게 잔소리하느냐고 전화로 따지던 남편 때문에 미안하다며 속상해 하던 친구… 우리 모두 모여 이렇게 웃고 있는데 햇수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꼬박꼬박 공부도 하고 이렇게 한 번씩 바닷바람도 쐬고 앞으로도 주욱 그렇게 꼬박꼬박 공부도 하고 그렇게 바닷바람도 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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