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② 손끝으로 발언을 듣다
[그 시절 우리는] 국회 속기사② 손끝으로 발언을 듣다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8.06.24 1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기본문자라고 해서 가나다라마바…를 표시하는 속기 부호가 따로따로 있지요. 하지만 일일이 그렇게 낱낱의 부호로 적으면 속도를 낼 수 없어요. 가령 ‘합니다’는 이렇게 빗금 하나를 쭉 그으면 되고, 그 위에 점을 하나 찍으면 ‘합니까’가 되고….”

왕년의 국회 속기사 김진기 씨가 속기의 기본 원리를 설명한다. 그러니까 자주 쓰는 말들은 일일이 음절단위로 적는 게 아니라, 한 덩어리의 어휘를 간단한 부호 하나로 나타낸다는 얘기다. 따라서 능숙한 속기사들의 경우, 국회의원이 발언을 마침과 동시에 그것을 받아 적는 동작도 끝마칠 수가 있다. 제헌국회 때는 여야 의원들 간의 다툼으로 속기사가 속기록을 즉석에서 낭독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아니, 내가 언제 국무위원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고 트집이야!”

“뭐라고? 아니, 다른 의원들이 다 들었는데 계속 잡아 뗄 거야?”

“국무위원을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고 했잖아! 발언 당장 취소하고 사과해!”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사과를 하라는 거야!”

“이봐요, 의장! 조금 전 박 의원이 한 발언을 속기사 보고 한번 읽어보라고 하세요!”

결국 속기록 확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속기사가, 글자가 아닌 부호로만 받아쓴 기록장을 들고 일어나서는, 조금 전 박 의원의 발언을 큰 소리로 낭독한다.

“박 의원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무부 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문제가 참 많아요!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에 나와서 했던 약속을 두 번 씩이나 어겼어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들이라고!’ 이 때 의석에서 ‘발언 취소해!’ 등의 소란이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당사자인 박 의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놀랍기는 여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속기록 낭독으로 불리해진 쪽이든 유리해진 쪽이든, 자신들이 했던 발언을 부호문자로 된 기록장을 보고서, 마치 시간을 되돌리듯 판박이로 재생을 하는 속기사들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 했다.

회의가 열리면 속기사들은 2인 1조로 2개조가 회의장에 들어간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내용을 속기한다. 한 사람이 잘 못 알아듣거나 빠뜨린 말이 있을 경우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속기사들 사이에서는 의원들의 발언을 귀로 들으려 해서는 안 되고 손끝으로 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보통 10분 동안 발언을 하면 글자 수로 따져서 3천 자 내외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받아 적다 보면 우선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금세 녹초가 된다. 그래서 10분 단위로 교대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열심히 속기를 하다가 10여 분이 지나면, 대기하고 있던 다른 두 사람이 기회를 봐서 어깨를 툭, 쳐서 교대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앞 조가 10분 동안 휴식을 가졌다가 다시 10분이 지나면 신호를 보내서 또 임무교대를 하고….”

그 2인 1조 중에서 경험이 많은 베타랑 속기사를 ‘주무’라 하고, 그를 보조하는 속기사를 ‘부무’라고 한다. 제헌국회 때에는 지금의 상임위원회를 분과위원회라고 불렀는데, 속기사가 통 들어서 12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속기사들은 본회의에만 참석을 하고 분과위원회에는 참석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 시절의 상임위원회 회의 내용은, 요점만 정리한 회의록 형태로는 남아 있지만, 의원 개개인의 발언을 상세히 적은 속기록으로는 작성되지 못 했다.

국회의원들 중에서 속기사들로 하여금 진땀을 흘리게 만든 의원이 있었다. 3, 4, 5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선태 의원이었다. 본회의 발언자 명단에 그 의원의 이름이 보이면 속기사들은 초긴장을 했다.

“오늘 자네 회의장에 들어갈 차례지? 잘 걸렸네. 그 속사포 만나서 진땀 한 번 흘려보라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