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선을 넘어서

  • 입력 2018.02.04 12:26
  • 수정 2018.02.04 12:29
  • 기자명 최용혁(충남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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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충남 서천)

“선을 넘자!” 전국농민회총연맹 신임 지도부의 선거 구호이다. 근래 보기 드물게 직접적이면서도 은유적이고 역사적이면서도 시적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수학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선과 면 등의 도형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지, 전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선을 넘자!”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정월 대보름의 마을회관 같은 대동세상이거나 광화문광장에서 엿본 직접민주주의 또는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민중 권력이 반드시 있을까? ‘하늘엔 비둘기 날고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았다’는 멋진 이야기가 있고, 천년을 쌓아온 원한이 땅 풀어지듯 녹아내리는 봄 기운이 흘러넘칠까? 또 다른 갑질과 완장의 교체와 더욱 커다란 실망도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이제는 잘 알지만, 그 한복판을 반드시 헤치고 나가야 한다.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동경과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삶의 원동력이고, 가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과 절제의 변증법이 성장해 온 경로이다. 선의 이쪽은 편안한 쉼터, 저쪽은 금단의 땅. 자본과 권력이 그었든, 동지와 애인이 그었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지금에 와 있다. 하긴, 교복을 입은 후로부터 선을 넘고, 담을 넘는 것은 가장 짜릿한 일이었고 일상의 꿈이었다. 그것이 전진을 의미하든 변질을 의미하든.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려는 담력과 모두가 어깨 걸고 반보씩 전진하는 인내의 사이에서 우리는 선을 넘어왔다. 지금부터는 선을 극복하는 다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 텐데,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수학에 대한 이야기이지 전농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먼저 선보다 한 차원 진보된 면을 만드는 것인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나의 점을 더해 삼각형을 만드는 일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우습게보고 덤벼들었다가 많은 사람들이 헛발질을 하는 곳이다. 근본 없는 ‘제 3의 길’일 수도 있고 이쪽과 저쪽 모두에게 개량이라고 불리는 점이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가거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기 위해 만든 점이기도 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의 두 점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명인데, 나무가 나무에게 말한 ‘우리 숲이 되어 나가자’고 한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삼각형을 이루는 마지막 점의 이름이 중요하다. 뭐라 할 수 있을까? 성찰과 반성의 점? 소통과 포용의 점? 우주와 자연 법칙의 점? 어쨌든 통쾌한 이름이 붙여지고 팽팽한 삼각형이 완성된다면 우리는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일단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혼자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삼각형에 안주하다가는 같이 숨 쉬는 공간이 같이 묻히는 묘지가 될 수도 있다. 운동의 지속성, 일상성을 갖추려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원이다. 원만이 스스로 운동할 수 있고 차원을 넘어서 다른 도형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나와 나 아닌 것과 공공의 선은 늘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전원이 되는 것이다. 온 우주를 빨아들일 수 있는 블랙홀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할 태세도 갖추어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선과 면 그리고 도형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학포기자임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는 어설픈 논리이지만 일단 선을 넘어서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넘자. 선의 선도 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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