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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로 포도농가 소득 안정에 기여이 사람 ㅣ 서상주농협 수출공선회 황재웅 회장
까다로운 각 나라별 농약 허용기준 극복 … 500톤 이상 수출 목표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2003년 국회에서 한-칠레 FTA 비준한다고 할 때부터 2004년 쌀 재협상 때까지 2년간 200일이 넘게 밖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을 할 때 인데, 그때가 농민회 전투력이 가장 강할 때였어요. 국회 앞에서 집회하고 한강대교 위에 우리 부장들 올려 보내고….”

2003~4년은 황재웅씨가 농민운동가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며, 우리 농업이 근본적으로 변화가 시작된 시기이다. 이미 1995년부터 WTO 체제가 들어서면서 농업개방이 됐지만 이후 다자협상인 WTO는 답보상태를 보였고, 이에 대응해 양자협상인 FTA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 FTA인 한-칠레 FTA는 농민들에게는 사활이 달린 문제였고 쌀 재협상은 농업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협상이었다. 이 때 실패한 쌀 재협상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쌀 문제를 노정시켰다.

많은 농민들이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나섰지만 역부족이었고, 긴 투쟁 속에서 앞장 선 농민들은 오랫동안 개인적 고충을 감내해야 했다.

“농민회 사무국장 4년 하는 동안에 농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바깥 활동이 워낙 많고 긴박하다 보니 사실상 방치 농사나 다름없었지요. 농사지어서 돈을 벌기는커녕 빚이 늘어가고 거기에 어깨보증선 것을 떠안게 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농민운동가들이 겪는 고충을 황씨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농민회 활동은 아무런 보수도 없이 자발적으로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내 농사를 소홀히 할지라도 우리 농업을 지키는 공적활동을 게을리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다가는 가족이 해체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제적 피해를 줄이려면 이혼까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농사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는 4년간 농민회 사무국장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와 ‘농민회 직책을 맞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새로 시작하는 심정으로 포도농사에 매달렸다.

“포도밭 마다 농막을 다 지었어요. 매일 아침밥 먹으면 포도밭으로 갔어요. 일하다가 피곤하면 농막에서 쉬고, 낮잠도 자고 하면서 포도밭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어른들이 ‘농작물은 주인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딱 맞더라구요. 1년, 2년 지나면서 포도농사가 눈에 띄게 좋아 졌어요. 3~4년 후부터는 경제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그때 악착같이 농사지은 덕에 위기를 넘기게 된 거죠.”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황재웅씨가 포도 수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밝게 웃고 있다.

농민회 직책 내려놓고 시작된 포도농사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사정은 순탄치 않았다. 마음 둘 곳 없던 사춘기 소년 황재웅의 방황도 이 무렵 시작됐다. 공부 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1학년을 겨우 고향에서 마치고 서울로 전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울생활의 시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기사병(방위병)으로 군복무 후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게 청소년기를 지내온 청년 황재웅에게 조직생활은 맞지 않았다. 이내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포도농사가 괜찮았어요. 그래서 이 동네에도 포도농가들이 많이 늘어났죠. 저도 고향에 내려와서 포도농사를 짓기로 하고 포도를 새로 심었어요. 동네 친구들이 도와주고 포도 묘목은 삽목을 하는 것이라 비싸지도 않고 해서 투자비가 거의 안 들었어요. 지주는 시멘트로 직접 만들고.”

이렇게 그는 경북 상주 모동면에서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

“묘목을 심고 3년차가 되니까 수입이 쏠쏠하더라구요. 적성에도 맞는 듯했고 그래 고향에 눌러앉아 포도농사를 지어야겠다, 결심을 한 거죠. 농사는 농번기에만 바쁘게 일하니까 시간적 여유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도 많지만, 직장생활은 매일 출근해야 하고 빡빡하기도 하고….”

자유분방한 그에게 농사는 몸에 딱 맞는 직업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결혼도 했다. “20년 전인 1977년 28살에 결혼했어요. 그 당시 농촌총각이 결혼하기 힘들어 ‘농촌총각결혼대책위’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 친구 소개로 아내를 만나서 2~3년 연애를 하고 결혼했어요. 아내는 상주 시내 사람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게 어떤 건지, 농사일이 어떤지 전혀 몰랐어요. 알았으면 아마 결혼 안했을 겁니다. 결혼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죠. 농사로 살림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농사를 지으며 지역의 선후배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농민회 활동도 하는 등 그는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됐다.

“20년 전만 해도 농촌사회에는 위계질서라는 것이 있어서 지역의 형님들이 시키면 동생들은 무조건 따르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지역 형님들을 돕고 따르면서 자연스럽게 농민회 활동을 하게 됐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모동면 농민회 총무도 하게 되었고.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까지 맡게 되더라구요.”

그는 농민회 활동을 통해 농업문제 그리고 농업의 가치를 인식하게 됐고 농업 농촌을 지키는 일에 나서게 됐다. 개방의 파고가 물밀 듯 들어오던 시절 황씨는 농민운동가로 헌신하게 됐다.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이 된 첫 해에 개최된 전국농민대회에 상주에서 90대의 버스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 때는 정말 마을 사람들을 통째로 버스에 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상주시농민회의 목표가 버스 100대인데 다 채우진 못하고 90대를 채웠죠.”

이 투쟁은 2000년 11월에 개최된 30만 농민 대항쟁이었다. 개방의 파고에 대항하는 사상 최대의 농민들의 대중투쟁이었다. 여의도 고수부지에 10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농산물수입개방 반대를 외쳤다. 이 투쟁을 계기로 농민들은 자신감을 얻고 이후 농민투쟁을 지속시키게 하는 계기가 됐다.

허나 황씨는 4년여의 상주시농민회 사무국장 활동으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활동을 접고 수년간 농사에 전념한 끝에 위기를 극복하고 포도작목반에서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이 2007년에 포도 수출 단지로 지정이 됐어요. 그런데 보조금에 매력이 있어서 수출하는 척만 했어요. 정부가 수출단지를 1년에 한 번 평가하는데 우리 단지가 성적이 나빠 수출단지 지정이 폐쇄될 기로에 서게 됐죠. 그래서 작목반원들이 전부 모여 회의를 했는데,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어요. 계속 해보자는 사람도 있고, 포도가격이 등락폭은 있지만 국내 가격이 좋은데 굳이 수출할 필요가 있냐는 사람도 있고.”

이날 회의에서 안할 사람은 빠지고 할 사람들만 모여서 다시 시작해 보자고 결론을 냈다. 그리고 황씨가 수출작목반 회장을 맞아 꾸려가기로 했다. 40여 농가에서 27농가로 축소된 채로 포도 수출작목반은 다시 출발하게 됐다.

“수출한다고 가격이 높은 것도 아녜요. 국내 시세가 좋을 때가 더 많아요. 그렇지만 수출은 안정적인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 소득안정에 기여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수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사만 지으면 바이어들이 사가는 것도 아니고 각 나라마다 다른 검역조건을 맞춰야 하는 등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수출하려면 수출기준에 맞춰서 농지관리를 철저히 해야 해요. 그렇게 한다고 바이어가 오는 것이 아니라 바이어를 찾아 다녀야 해요. 그래도 배워가면서 수출을 조금씩 하다 보니 업체와 신뢰가 구축되고, 물량이 늘어나게 되더라구요. 계속 수출을 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기고 해외에 나가서 판촉행사를 하면서 각국의 소비자 패턴도 익히고 그러면서 수출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어렵고 까다로운 것은 각 나라마다 다른 농약안전성기준을 맞추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없는 농약성분이 어느 나라는 문제가 되기도 하고 어느 나라는 허용되는 등 복잡한 나라별 기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없었다.

“정부에서는 농산물 수출을 권장하면서 각국의 농약 허용기준 하나 정리 된 게 없었어요. 검역본부, 농촌진흥청 등 관련기관에 자료는 있는 것 같은데 담당자가 숙지되어 있지 않거나 통일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현장에서는 막막했는데 3년 전에 비로소 만들어졌어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농민들 몫이었고 작목반장인 황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그 뿐 아니라 수출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농약 사용에 한계가 있고 수출국 기준에 맞는 농약을 치면 효과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재배지 관리 기준 때문에 나이든 농민들은 힘겨워서 떠나기도 했다.

“비료 포대, 폐비닐, 농약병 등을 밭에 두면 안돼요. 방청소 하듯 청결하고 위생적으로 관리해야 해요. 매년 검역본부에서 나와서 점검을 하는데, 축사가 옆에 있어도 안 되고 퇴비가 무더기로 밭둑에 방치해도 안 되거든요. 옆에 밭에서 자기 밭에 쓴다고 퇴비를 쌓아 놓아도 지적사항이 되기 때문에 솔직히 힘들죠.”

그럼에도 최근 몇 년간 국내 포도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수출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서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포도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황재웅씨가 이를 알리는 현수막 앞에 서 있다.

포도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까지

10년 전 농민운동가로 열정을 불태우던 황씨는 지난 10년간 농민으로 자리를 잡았다. 포도농사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포도 수출작목반을 이끌면서 큰 성과도 내고 있다. 27농가에서 다시 시작한 수출 포도작목반은 이제 40여명으로 회원이 늘어났다. 회원들이 생산한 물량의 3~40%를 수출하며 포도농가 소득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회원들이 어려운 가운데 잘 따라줘서 지금의 성과를 만들었다고 봐요. 지금은 250톤 정도 수출하는데 앞으로 목표는 5~600톤까지 수출하는 겁니다. 우리지역에서 생산하는 포도의 10%정도 되는 물량 이예요. 한 박스라도 해외로 나가면 국내경쟁이 용이 하니까요.”

황씨는 포도 수출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11월 3일 제56회 농식품 안전·품질관리 정부포상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0년 전 신용불량자 신세였는데 포도농사로 4년 만에 정상화 시켰어요. 농사를 지어 가능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컸죠. 이번 대통령상을 받게 된 것도 작목반원들의 고생, 그리고 지역의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과분한 상을 받았어요. 농민회 활동은 직책을 맡지 못해 항상 미안하죠. 농민회 일에 머릿수라도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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