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선창의 추억

  • 입력 2017.06.11 12:00
  • 수정 2017.06.11 12:03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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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희(제주시 구좌읍)]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고기가 많이 잡힌 날은 먼 바다에서 부터 아득한 고동소리가 들리고 동네 사람들은 손에 담을거리들을 들고 선창가로 모여들었다. 돛단배는 풍선배, 엔진이 있는 배는 통통배, 멀리서 점들이 보이기만 해도 “저기 석희 족은 하르방네 풍선배가 일등으로 왐쩌”.

일찍 고동분거 보난 괴기 하영 잡은 거 닮다. 윗동네, 옆동네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들 입맛 다시며 한 소리씩 해대니 선창가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의 놀이터는 늘 바다여서 고동소리가 들리든 말든 맨 앞줄을 차지했다. 이런 풍경이야 바닷가 마을에 살았으면 누구에게나 그려지는 그림이다.

우리 마을에는 무슨 재미난 얘기거리가 없었나… 세월이 지나버려서 옳게 담아두지 못해서 잊혀져 버리는 일은 없었을까?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내 기억들은 꿈결에서 본건지 정말 있었던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섯살 때 나는 이미 술맛을 알아버렸다. 바닷가 10미터 우리집에는 방이며 마루며 마당에까지 동네 어른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하게 바닷물에 떠 내려온 온갖 외국 술병, 먹도 보도 못한 통조림 깡통으로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 나는 포도주에 취해 헤롱거렸던 것 같다.

“삼춘, 이거 45년 전 일인거 닮은디 기억남수과? 내가 말허면 도대체가 믿질 않아 녹음이라도 할테니 도와줍써.” 칠십다섯이지만 아직도 멋드러지게 돌담을 쌓는 최고의 장인으로 ‘마지막 돌챙이’라는 닉네임을 붙여드린 ‘오경용 삼춘’을 졸랐다.

“저 서쪽 바당 멀리 파도 막 센디 봐보라. 저긴 깊은 바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암초여. 거기 큰 외국배가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난, 배에 실은 짐들을 바다에 버리고 겨우 빠져 나간거라. 다른 물건도 많았지만 그 때는 술하고 먹을 것이 최고였던 시절이었어. 어디 팔러 다닐 재주는 없어서 맨날 취해 있었지”라고 바로 어제 일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해 나갔다.

 

오경용 삼춘이 더 어렸을 때는 육지에서 사과를 실은 배가 ‘여’에 부딪혀 파손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그 암초 지대 이름은 ‘배 부서진 여’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선창을 성창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바닷가에 있는 큰 돌로만 파도를 이길만큼 성처럼 배 매는 곳을 만들었으니 ‘성창’이라고 우길만 하다. 그 성창 돌구멍에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사과가 알알이 들어와 박히니 우리 마을 성창에는 사과가 열렸었다고 자랑하고 다닐만 했다. 썰물이 되면 없던 사과가 밀물이 되면 다시 나타나기를 한참 이었다고 하니 사과맛도 좋았겠지만 그 재미란….

즐겁던 그 때, 그런 일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도 일어나게 된다. 해삼, 전복을 팔아 돈을 만들 수 없던 시절에 해녀들이 ‘배 부서진 여’에 도진을 한 것이다. 술 상자나 그릇, 돈벌이가 되는 물건에 욕심을 부리다 해녀 두 사람 목숨도 팔아야 했다. 엊그제 옆마을에도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우뭇가사리를 뜯으러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간 팔십 넘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남들 다 돈버는 일을 자기도 한다”며 “바당은 아무나 다 가는 것이여” 라며 욕심을 부리다 목숨을 버린 일이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다. 바다는 늘 마음대로 와서 가져가라고 내주지만 욕심의 대가는 너무나 크다. 동네 사람들에게 선창가의 추억은 아픈 기억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녹음을 도와준 경대형님이 한편의 동화도 되고 만화도 되고 책으로 만들어도 좋을 얘기를 들었다며 사진기를 들고 선창가를 돌고 있다. 자기 일들과 말들로만 하루가 채워지고 같이 했던 것들은 기억 저편에 두고 사라지게 되는 모양이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이야기, 이젠 내가 먼저 찾고 뭔가에 담아 보겠노라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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