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에게 거는 기대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0

  • 입력 2008.04.20 03:09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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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의 복숭아밭에서 퇴비 내는 일을 마치고 밭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무니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실컷 울고 누가 죽었느냐고 묻는다더니 종일 꽃밭에서 일을 하고도 꽃을 보고 놀라다니. 온 밭에 복사꽃 만발이다. 붉은색의 천도복숭아 꽃부터 피기 시작하더니 유모계의 연보라 꽃이 절정을 이루어 가히 절창이다. 그러나 나는 그 풍경에도 가슴에 파문 하나 일지 않는다. 감흥이 없다. 또 꽃이 피는구나, 그렇게 무덤덤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나에게 꽃은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고달픈 노동의 피곤함으로 다가온다. 저 꽃이 지면 열매 솎는 일의 아득함에 어질머리를 앓는다. 나무의 힘도 덜어주고 일거리도 줄이기 위해 나는 꽃을 따주어야 하는데 그런 속도 모르고 먼 도시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온다. 자지러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나는 심드렁하게 받아들인다.

“복사꽃은 피었나. 니는 참 좋겠다. 와아, 그 절경…… 나는 니가 부럽다 부러워.”

“꽃구경 가고 싶다야. 복사꽃 그늘 아래서 삼겹살 구워 소주 한잔 캬아, 어떠냐?”

“오랜만에 도원결의나 한번 하자. 시간 좀 내 주라. 마누라가 자꾸 들볶는다.”

하지만 올해는 무조건 사절이다. 가지치기부터 늦차를 타다보니 나는 아직도 퇴비를 내고 있는 중이다. 이달 26일에는 백신애 문학 심포지엄과 이후 행사가 줄줄이 잡혀 있어 일머리를 어떻게 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거기다가 어머니는 열흘이 넘도록 방안에 드러누워 계신다. 입만 열면 중풍 걱정을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일이 터져버렸다. 오른쪽 팔이 마비되어 한의원엘 갔더니 80% 이상 진행되었단다. 약을 짓고 이틀거리로 침을 맞으니 약간의 차도가 있기는 한데 영 힘을 못 쓰신다.

집 뒤 밭에 퇴비를 싣고 들어가니 복사꽃보다는 땅바닥에 낮게 엎드린 민들레의 노란 꽃이 눈길을 잡아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들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는데 노란 꽃을 피운 것을 보니 그 숫자가 엄청나다. 한 발자국도 민들레를 밟지 않고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지천이다. 앉아서 가만히 민들레꽃을 바라보니 곱기가 복사꽃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파리는 바닥에 붙었고 그 위에 봉오리를 뾰족하게 밀어 올려 터뜨린 노란색이 한없이 곱다. 복사꽃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민들레는 야생의 청초함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개체수를 늘렸는지 그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다.

작년인가 텔레비전에 민들레가 몸에 좋다는 방송이 나오고부터 봄날이면 민들레 캐러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작년에는 민들레 가루가 유행이더니 올해는 엑기스가 유행이다. 혹시나 싶어 삽으로 그중 큼직한 한 포기를 캐보니 뿌리가 굵고 길다. 올해 이 민들레 홀씨들이 먼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우리 밭에만 자리를 잡는다면 세상에서 제일 넓고 아름다운 민들레 꽃밭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어두워지고 만다.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 고운 민들레 얼굴에 똥칠을 해야 한다니 여간 미안한 마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곱고 여린 민들레꽃봉오리 위로 거름을 흩뿌린다. 시커먼 거름을 덮어쓴 꽃대는 처참한 몰골이다. 한참 일을 하다가 살펴보니 민들레꽃은 거의 보이지를 않는다. 일손을 멈추고 꽃대 위에 덮인 거름을 걷어내 보기도 하다가 그만 둔다. 민들레는 며칠 후 스스로 거름을 걷어내고 꽃봉오리를 들어 올릴 것이다. 그럴 것이다. 짓밟히면서 튼실하게 자라는 것이 민들레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민들레가 다치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힘차게 퇴비를 뿌린다.

내년에는 이맘때쯤 복사꽃 절경에 안달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 밭으로 불러 민들레 축제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인간의 양식을 축내는 돼지고기보다는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와 보현산 청정 미나리를 된장에 찍어먹는 안주가 제격이리라. 술 마시다가 지겨워지면 한 두어 평 민들레를 캐 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내들은 술 마시는 남편의 몸을 생각해서 즐겁게 민들레를 캐리라. 그리하여 며칠 후 며칠 후 그 아내들은 아침마다 남편에게 민들레 엑기스를 내밀며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어쩌다 간혹 우리 복숭아밭의 민들레를 떠올리며 이맘때의 외출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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