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에어 콤푸레샤 그까짓 것

  • 입력 2017.03.26 14:35
  • 수정 2017.03.26 14:44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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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창고 구석에 전에 없던 기계가 보여서 이게 뭐냐고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에어 콤푸레샤라고 주로 기계 청소할 때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한테 빌려왔냐고 하니까 작년 가을에 산 것인데 몰랐냐고 왜 이리 관심이 없냐고 도리어 타박입니다. 사소한 것도 같이 의논하는 남편이 선뜻 산 것도 뜻밖이었고, 살림에 관심이 없냐고 하는 태도에는 짐짓 화가 났습니다. 살림에 관심이 없기는커녕 오매불망 잘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데 그 무슨 오명을 지우는 것이며, 무엇보다 아내 모르게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운 대목임이 틀림없었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말입니다.

언젠가 아시아의 여성농민들과 간담회를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각국에서 온 여성농민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한 여성농민이 “남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여성들은 가족들을 위해 돈을 쓴다”고 했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맞는 말이라고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나도 동의를 하기는 했으나 비약인 듯해서 조금은 여지를 두었습니다.

내후년이면 돌아가신지 오래된 친정아버지께서 딱 백세가 됩니다. 친정 부모님은 금슬이 좋아서 웬만해서는 다투는 일이 별로 없었다합니다. 그런데 큰언니의 가장 큰 불만은 친정어머니께서 경제권을 아버지께 넘겨 장성한 딸에게 보장돼야할 여러 가지 것들이 방치됐던 것이었다 합니다. 가령 유행하는 치마를 입고 싶다든지, 친구들과 시내로 놀러 가고 싶다든지 할 때 어머니의 섬세한 지원이 필요했음에도, 경제권을 쥔 아버지께서는 딸의 치마보다 논을 사는 것이 더 바빴던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콤푸레샤를 산 남편을 보며 비로소 다른 나라에서 온 여성농민의 이야기가 제대로 해석됐습니다. 남성들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는 말은 남성 자신만의 입치레 옷치레를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남성 자신의 기준으로 돈을 쓴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가족구성원의 생활적 요구는 뒷전이기 쉽다는 것이겠지요. 친정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 도시의 살림이야 정해진 월급에 나가는 곳이 빤하니 그렇다손 쳐도 농촌살림은 여전히 좀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팍팍한 농촌살림에 사야할 기계는 언제나 줄을 서고, 지출되는 범주도 크고 다양하다 보니 조금 복잡합니다. 그 과정에 옛날처럼 가족의 요구는 또 밀리기 쉽겠지요. 애들을 다 키운 분들이야 상관없지만, 젊은 층은 딱 그 가운데서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어려운 살림이야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 없지만 소비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삶의 또 다른 기술일 것입니다. 행복으로 가는 작은 기술 말입지요. 한 번 돌아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콤푸레샤를 사놓고서 엉뚱한 우격다짐으로 아내를 소외시킨 당신은 오늘도 유죄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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